『종교실현』 서문에서 저는 “경계선이야말로 지식을 습득하기에 최적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제 삶에서 어
떤 사상이 우러나와 발전해왔는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저는 경계선 개념이 제 지성 발전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데 안성맞춤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의 거의 모든 지점마다 두 가지 가능성 중
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두 가지 모두에 완전히 만족할 수도 없었고, 한쪽을 위해서
다른 한쪽을 강경하게 반대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유를 하려면 새로운 가능성을 기꺼이 수용해야만 하기에,
경계선 위에 설 때 사고하기에 유리합니다. 그러나 경계선 위에 서는 일이 실제로는 고달프고 위험한데, 그
것은 우리 삶이 끝없이 결단을 내려야하고 다른 선택 가능성을 배제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 운
명과 제 일은 경계선 위에 서려는 성향과 이 성향의 긴장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
‘저는 심각한 투쟁을 겪은 후 비로소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율에 도달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인격적이
며 지성적인 권위였는데, 교회 안에서 아버지의 직위 때문에 저는 아버지의 권위를 계시의 종교 권위와 동
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종교적으로 대드는 행위
로 간주했으며, 권위를 비판할 때 저절로 죄책감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하나의 금기를 깨부숨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책감이 수반된다는 인류의 해묵은 경험담
은 제 자신의 근본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신학적, 윤리적, 정치적 비판은 내적으로 장애물을
만났는데, 이 장애물은 오랜 투쟁을 겪은 후에만 극복되었습니다.
---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중에서
제 삶과 사상을 경계상황 개념으로 가장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지점은 신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선입니
다. 중학교 막바지 무렵 제 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가한 시간 내내 우연히 제 수중에 들어온
철학 서적을 읽었습니다. 한 시골목사의 먼지투성이 책장구석에서 슈베글러의 『역사철학』(Geschichte der
Philosophie)을 발견했고, 베를린 거리의 책을 잔뜩 실은 수레 꼭대기에서 피히테의 『학문론』
(Wissenschaftslehre)을 구했습니다. 소년처럼 흥분해서 그 당시만 해도 제게 거금이었던 50센트를 치르고 칸
트의 『순수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을 책방에서 샀습니다. 이런 책들, 특히 피히테의 책 덕분
에 저는 독일철학의 가장 난해한 면모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 제가 신약성서에 관한 역사적 식견을 얻게 된 것은 주로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와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The Synoptic Tradition) 덕분이었습니다. 에른스트 트뢸취
의 저술을 읽고 나서 중재신학과 이 중재신학의 변증론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졌던 잔재를 말끔히 씻어냈
고, 마침내 교회사와 역사비평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 신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양자의 논리적 관계성에 대한 명징한
개념부터 모색해야만 합니다. 제 『학문체계』가 이 작업을 했습니다. 이 책의 궁극적 관심은 다음과 같은 질
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학이 과학성(Wissenschaft)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신학의 여러 분과목들이 다른 학문과 연결되는가?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신학 특유의 방법은 무엇인가?
---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중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는 종교와 문화 경계 양측면 모두의 관점에서 정의되어야만 합니다. 종교는 절
대적인 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신(神)개념에 나타난 보편적 주장 역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문화 내
부의 한 특수영역이 될 수 없으며, 문화 옆에서 하나의 부수적(附隨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습니다. 자유
주의는 이 둘 중에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 종교를 해석해 왔던 경향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해석을 하든
지 간에 종교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종교 없이도 문화구조가 완전하고 자기충족적인 것이 되기에 종교는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문화가 종교를 좌지우지할 권리를 갖기 때문에 문화 자신의 자율성이
―결국 문화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진리입니다. 문화는 형식을 결정지어
야만 하는데, 이 문화형식으로 종교의 ‘절대성’ 내용을 비롯한 모든 내용이 표현됩니다. 문화는 종교적 절대
자의 이름으로 진리와 정의가 희생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종교가 문화의 내용이듯이, 문화는 종교
의 형식입니다. 양자의 차이점을 굳이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종교는 내용지향적이라는 사실에 있는데, 종교
의 내용지향성이야말로 의미의 무조건적(무제약적) 원천이자 심연입니다. 그리고 문화형식은 이 종교내용
의 상징구실을 합니다. 문화는 형식지향적인데, 조건적(제약적) 의미를 표현합니다. 무조건적 의미를 표현
하는 종교 내용은 문화가 부여하는 자율형식이라는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간파될 수 있습니다. 인간실존이
완전하고 자율적 형식체계(틀)로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무한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곳에서 문화는
극치에 이릅니다.
---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중에서
인간 행위에는 하나의 경계가 남아 있는데, 이 경계는 더는 두 가지 가능성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영원성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유한한 것에 부과된 한계로 남아있습니다. 영원이
현존할 때 우리 존재의 중심조차도 하나의 한계에 불과하며, 우리가 이룬 최고 수준의 성취조차도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회고: 경계와 한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