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3년 12월, 부여시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백제 금동대향로다. 더러는 이 향로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금동대향로는 발견 장소가 분명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반면, 반가사유상은 그러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백제 대향로는 세계 각국의 유수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무수한 초청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 「우물 속에 내던져진 왕의 분신_금동대향로」 중에서
금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나라에 강력한 지배체제가 확립됐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통치자의 시대가 열렸던 5세기 초의 무덤에서 금관이 무더기로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대가야도 왕권을 강화하면서 금관을 제작하게 되었다.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금관을 꾸몄다. 신라의 금관보다 가야의 금관이 소형인 것은 가야가 연맹 체제로 유지돼 왕의 세력이 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맛은 가야 문화만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 「공개조차 꺼렸던 소박한 가야 금관_고령 금관」 중에서
임진왜란 때 왜군을 이끌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숭례문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고 또 다른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흥인지문으로 진입했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우리나라 국보(당시 명칭 보물)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며 일련번호를 부여했는데, 공교롭게도 숭례문(당시 명칭 경성 남대문)을 보물 1호로 흥인지문(동대문)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한다. 이에 대해 임란 당시 왜군의 한양 입성을 기념하기 위한 속셈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일제는 1943년까지 순차적으로 340건의 보물을 지정했다.
--- 「숭례문은 왜 국보 1호인가」 중에서
1963년 5월 1일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와 준학예관 정양모에게 문교부 직원의 수출품 감정 의뢰가 들어왔다. 국내 공예품 회사가 미국의 연구소에 보내는 수출품이라는데 156점의 구입가가 2,000달러나 된다는 점을 수상히 여겼던 것이다. 인천 세관에 도착한 최순우와 정양모는 나무상자를 열어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상자엔 국보급 조선백자가 빽빽이 담겨 있었다. 미국인 두 명이 인사동을 다니며 쓸어모은 것들이었다. 최순우는 세관원에게 “세계 어디에도 자기 민족의 문화재를 수출하는 나라는 없다”며 반출을 불허했다.
--- 「국보를 수출하는 나라는 없다」 중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은 임진왜란 때 서울을 점령한 적군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 문헌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 예조판서를 지낸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은 “방화의 주범이 우리 백성”이라고 명백히 진술한다. 《송와잡설》은 “왜적이 도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성 안 사람들이 궐 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던 창고를 탈취하였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과, 크고 작은 관청에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쳤으며 한 달이 넘도록 화재가 이어졌다”면서 “백성들의 마음은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비통해했다.
--- 「경복궁을 불태운 조선 백성_경복궁 근정전」 중에서
첨성대는 우리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일체의 재건 또는 복원 없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통념과는 달리 첨성대에는 붕괴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우선 17층을 기준으로 몸통 상부 석재와 하부 석재의 가공법이 서로 다르다. 하층부 석재는 전부 모가 둥글게 가공됐지만 상층부 석재는 전반적으로 모가 각진 데다 중간 중간 둥근 석재들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맨 꼭대기인 31층 정자석도 금이 가 있거나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28층에는 분실된 돌이 있고 28층 남쪽 석재들과 27층 서쪽 석재들은 서로 위치가 바뀌었다.
--- 「첨성대 위에 진짜 정자가 있었을까_경주 첨성대」 중에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일기 중에서도 《난중일기》는 가장 귀중한 문헌이다. 이 기록유산은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알려준다.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 연구와 전략, 전술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록에서 언급되지 않는 일반 백성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거북선을 만들거나 활, 화살, 총포 등 무기를 만들던 장인들, 천대받던 승려들로 구성된 의병부대, 심지어 그가 잠 못 이룰 때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어주던 부하들에 관한 내용도 꼼꼼히 쓰고 있다.
--- 「적의 전술 분석부터 일반 백성 이야기까지_난중일기」 중에서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면서 1920대 초중반 불법 도굴업자들이 난무하는 최악의 ‘대난굴 시대’가 전개된다. 평양 시민으로서 낙랑 거울과 낙랑 토기 항아리 한 개쯤 없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말까지 떠돌 지경이었다. 낙랑고분 조사보고서도 “1,400기의 고분 중에서 도굴을 면한 것은 겨우 140기뿐”이라고 기술한다.
--- 「2,000년 전 한반도로 집단이주한 중국인의 자취_석암리 금제 띠고리」 중에서
국보의 지정 여부는 문화재위원회가 분과별로 심의를 통해 결정한다. 그러나 종종 문화재위원들의 전문성 부족으로 적격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보 중 자격 미달이거나 가짜로 판명 나 영구결번된 것이 세 건이나 된다. 국가문화재 지정 과정에서의 부실 검증이 가장 큰 원인이다. 국보 제168호였던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제작 지역과 가치 논란이 끊이지 않다가 지정 46년 만인 2020년 6월, 국보 지위를 잃었다.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면 해당 지정번호는 영구결번 처리된다.
--- 「국보 지정의 문제점」 중에서
실학적 기풍이 빛을 발하던 시절에 지식인들은 정선의 혁신적인 그림에 열광했다.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정선은 산수를 포함해 인물, 화조, 초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총 4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 「생계 위해 그림 선택한 양반 화가_인왕제색도·금강전도」 중에서
신종의 고단한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1506년(중종 원년)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자 경주부윤 예춘년이 노동동 봉황대 고분 옆에 종각을 지어 종을 가져왔다. 경주 읍성의 성문을 여닫을 때마다 종을 쳤는데, 철종 때 대사헌을 지낸 홍직필(1776~1852)은 “종소리가 도성 거리에 진동하여 성안에 가득하니 (…) 아직까지 천년 고국의 소리 울리는구나”라며 감상에 젖었다.
--- 「덤불 속에 버려졌던 신라의 종_성덕대왕신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