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코이케 유리코 의원이 방위대신에서 퇴임했다. 이 자리에서 코이케 의원이 퇴임 인사로 ‘여자의 본회(本懷, 본심)’라는 말을 사용해 한때 화제가 됐었다. 코이케 의원의 이 발언은 남자에게 ‘남자의 본회’가 있는 것처럼 여자에게도 ‘여자의 본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코이케 의원의 그 발언에는 ‘남자들 중심의 정치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대신의 자리에 올랐지만 역시 남자들에게는 당할 수 없었다’라는 원통함과 ‘여자라고 얕보지 마라.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당찬 야심이 배어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 ‘여자의 본회’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퇴임식 인사에서 그 문구를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코이케 의원은 여성 정치인 중에서 ‘여자력’이 높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그녀는 ‘여자’라는 말을 사용해 자신을 홍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도 미리 계산해 놨을 것이다. --- pp.47-48, 「여자라는 자의식」 중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는 자신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제멋대로’라는 표현을 쓴다면,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궁극의 ‘제멋대로’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고 싶다. ‘여성들이여. 당신들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용기와 각오가 있는가?’ 여자란 원래 남의 시선을 먹고 사는 생물이다. 그런 여자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러기는 쉽지 않다.
여자들은 남자와 대립해 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뿐 큰 이득도 없다. 남자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면 솔직하게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여자들의 본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섣불리 남자에게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는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들을 자극하는 이성으로의 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싫지만 그렇다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약한 존재로서의 여자로만 보이는 것도 싫은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같은 여자에게 미움 받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다. --- p.63, 「여자라는 자의식」 중에서
그러나 이렇게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는 경우는 매우 보기 드물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예상 밖의 상황과 자신을 꾸미는 일에서 기쁨을 얻고 여성들끼리의 결속을 다지는 일상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했을 때 얻는 것과 동성(혹은 자신)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얻는 것의 가치 차이, 각각을 선택했을 때 생기는 위험과 얻을 수 있는 이익,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것들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동성의 지지를 버리면서까지 남자를 손에 넣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까지 해서 남자를 선택했는데 만약 천연 미인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본전도 못 찾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느니 차라리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여자들의 공동체에서 존경과 동경과 신뢰를 얻는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위험 부담이 훨씬 적다. 만약 남자를 통해 피인정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다면 성욕이나 애정과는 다른 기준으로 남자를 선택해야 문제가 없다. --- pp.117-118, 「모든 패션의 선두에는 여자가 있다」 중에서
‘나쁜 여자’란 어떤 여자들인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남자의 마음을 농락하는 여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특별히 남자의 마음을 농락하자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그저 마이페이스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남자의 마음을 농락한다. 이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남자의 마음을 농락하는 여자들을 바로 ‘나쁜 여자’라고 부른다.
‘나쁜 여자’들은 어떤 계산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본인들은 농락하려는 의도가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다. 이런 ‘나쁜 여자’들의 가장 큰 매력은 아름다운 얼굴이나 멋진 몸매가 아니다. 바로 요염함이다. 섹시함, 요염함, 관능미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나쁜 여자’들은 여름에 날씨가 더워지면 블라우스 버튼을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로 풀어헤치고 옷자락을 팔락거린다. 남자와 웃고 떠들다가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입술을 모아 내민다. 전철에서 졸리면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기도 한다. --- pp.165-166, 「연애 파시즘」 중에서
나카무라 우사기는 ‘남자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자들은 파트너로서 동성을 찾는다’라고 적고 있다. ‘아이’도 ‘동성’도 모두 여성의 ‘분신’이다. 이와 같이 나카무라 우사기의 관심은 이제 ‘자신 찾기’에서 ‘파트너 찾기’로 바뀌었다.
남자가 더 이상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남자는 이제 단순한 수컷에 불과하다. 섹스를 제공해 주는 페니스가 달린 생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카무라 우사기는 연애 감정 없이는 섹스도 없고, 섹스 없이는 연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뭔가 감정적으로 강한 교감을 갖는 그런 깊이 있는 관계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젊고 아름다운 외모와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의 연장선상에의 섹스의 쾌감만을 바란다. 그것뿐이다. 감정의 교류까지 갈 필요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욕정을 품는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령 서로가 남자로 가장하고 여자를 흉내를 내고 있더라도 그 순간만 잘 모면하면 된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p.305-306, 「'자기' 나선(螺線) 속에 빠진 여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