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생명이자 생명의 수여자이기 때문에, 영은 항상 박테리아,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하느님이 생명의 기운(영)을 불어 넣은 인간 존재들의 생명 속에 현존했다(창세기 2:7).
우주 속에 존재하는 영은 우주 내의 모든 사건들에 참여한다. 즉 초신성의 거대한 폭발 속에, 갤럭시들의 충돌 속에, 지구 생명체들의 멸종 속에 참여한다. 영은 피조물과 더불어 기뻐하고 그와 함께 고통을 겪으며 그 피조물들과 더불어 절규하고 그들과 함께 해방을 위해 신음한다(로마서 8:22-24). 성전 안의 하느님 거주(shekinah)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람들과 더불어 추방되며 되돌아오기도 한다. 영은 심지어 인간 드라마에 의해서 억제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에베소 4:30).
교회는 부활하여 영적 존재가 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더 이상 한계들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역시 당연히 교리들, 의례, 예식 그리고 그의 법적 조치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힐 수 없다. 교회 공간을 넘어 진화와 역사 속에서 영의 자기표현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영의 이런 자기표현들과 더불어 성장하면서, 불가피한 돌연변이들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려고 모험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영의 표현들은 영의 활동의 일부이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 역사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는 항상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성령은 교회조직의 고전적 구조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형식을 고무한다. 고전적 구조는 거룩한 능력(sacra potestas)을 소수의 손에, 교황으로부터 추기경, 장로, 집사들에게로 하향식으로 분배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배적인 패턴이었으나 이에 반대하는 긴장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공동체적 평등성보다 공동체적 계층성에 기초했던 탓이다. “하나의 성령 안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고 우리 모두는 한 성령을 마셨다”(고린도전서 12:13). 공동체적 계층성이란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교제는 개념상 계층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교제는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 상호간 형제와 자매라는 근본적인 평등성 안에서, 오직 공동선을 창출하기 위한 기능적 차이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몰락하자 레오 대제는 본래 황제들에게 속했던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취했으며, 또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엄격하게 사법적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장차 정치적 권력이 되어 그 모든 화려함, 궁전들, 궁중 예법을 갖게 되었다. 황제들의 의복들, 예컨대 자주색 겉옷, 금색 지휘봉, 어깨 망토, 권력의 상징인 수로 장식된 스톨 등은 이제 교황들이 착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교황들이 그리스도의 소망과는 반대로 세상의 주님들이 된 모습이다.
계층적 교회가 더욱 많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교회는 점차 하느님의 백성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가난한 사람들과도 멀어졌다. 권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사랑과 자비를 향한 문은 닫히게 마련이다. 권력 위에 세워진 기관들은 완고하며, 융통성이 없고, 보수적이며, 일체 새로운 것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 모든 영적 은사들은 의심을 받는다. 신비주의자들은 박해받지 않을 경우 항상 감찰대상이다. 그런 제도들은 철학자 홉스가 그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말했듯이 모든 권력의 논리를 추종한다. “권력은 항상 더 많은 권력을 원한다. 권력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권력뿐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런 상황이 결코 도전받지 않았으며, 교정되지 못했으며, 겸손하고 가난한 예수, 박해받은 예언자, 고난 받는 종의 삶, 복음의 순결한 판단 아래 비판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들 교회의 위계질서는 여전히 왕궁과 궁정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가 베들레헴의 마구간보다 헤롯의 궁전과 비슷하게 된 탓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모른 체하는 영성이란, 영의 부름에 귀 막은 거짓 영성이다. 아무리 신실하게 기도하고 찬송하며 춤추고 경배할지라도,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Pater pauperum)로서의 성령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기도는 자기만족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 이를 수 없다. 성령과 그의 은사들은 결코 이런 기도 속에는 부재한다.
예수는 그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광폭하고 무자비한 심판자로서의 하느님 이미지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를 대신하여 예수는 친절한 아버지 하느님, 즉 하느님의 우선적인 특징이 심지어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자비롭고 선한 하느님을 선포했다(누가 6:35).
또한 예수는 당시를 지배했던 법과도 맞서 투쟁했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유대적 삶의 조직 전체를 총괄하고 있던 법과 싸웠던 것이다(Comblin, O Espirito no mindo, 62-63). 예수는 아주 격렬하게 외쳤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 이것들도 소홀하지 않게 행했어야 했다”(마태 23:23).
강자가 되려는 생존투쟁은 현재까지 이르는 생명의 지속성을 옳게 설명하지 못한다. 생명을 지속시킨 것은 협력과 연대로 표현되는 사랑이라는 관계성이다. 우리들의 조상인 영장류는 사냥한 것과 채집물을 서로 나눔으로써, 즉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중에 인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의 가장 큰 특징인 언어 자체는 이렇듯 사랑과 나눔이라는 관계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우주와 모든 존재들은 영으로 흠뻑 적셔져 있다. 우주 곳곳에서 그의 현존을 인식하는 것이 영성의 과제이며,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과제이다.
세상 속에는 불의, 적대감 그리고 비굴함이 가득 차 있다. 하느님 나라와 그에 반하는 나라가 지속적으로 맞대결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적과 마주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고 죽임을 초래하는 거대한 적, 원형적인 적과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악마라고 불리는 부정성의 권세이다. 성령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성령은 우리로부터 부정적인 것, 생명에 적대적인 일체의 것을 몰아낸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