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구구십리’라는 별명처럼 호서 지역 전체를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을 만큼 지역 내 접근성이 좋았다. 구구십리란 충청 관내 9개의 군현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뜻으로 동쪽의 회덕·진잠, 남쪽의 부여·니산(노성)·연산·진산, 서쪽의 대흥과 북쪽의 천안·연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장점은 여전해서 공주는 지금도 세종특별자치시, 대전광역시 그리고 충남의 계룡시, 논산시, 부여군, 청양군, 예산군, 아산시, 천안시 등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호남대로의 중간 거점이었던 공주는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의 요지이기도 했다.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호서지방의 육로와 금강의 뱃길을 따라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선운이 맞닿은 지리적 이점은 공주를 호서의 중심지로 꼽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 뱃길은 조선팔도에서 가장 넓은 호남평야와 곧장 연결된다. 다시 말해 가장 풍부한 물산지대가 육로와 수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 p.31~32, 「공주의 가치를 발견하다」 중에서
공주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도 인정받은 곳이다. 군사요충지로서 공주의 가치는 1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각 도의 감영을 한 지역에 상주하도록 재편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공주는 앞서 설명한 교통 거점의 장점과 천혜의 요새로서 군사요충지의 역할까지 잘해냈다. 호서 지역을 이끌고 관할하는 수부도시로서 충청감영이 설치될 이유는 충분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은 공주를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고, 도시로서의 장점과 기능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 p.37, 「공주의 가치를 발견하다」 중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부터 공주는 ‘호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이며, 남쪽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湖西最要之關防 南下第一關防’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다시 부임한 유근은 먼저 공산성을 복구하고 산성 안에 자리를 마련한 뒤 충청감영을 공주로 옮겼다.
--- p.39, 「공주에 감영을 설치하라」 중에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과거 충청도의 최고 관청이었던 감영은 수난을 겪으며 그 자취를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 특히 두 차례나 감영이 있었던 구영 터는 문헌이나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고, 공주 구도심에 빼곡하게 들어선 주택 때문에 발굴조사도 어려워 아직 그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또한 도청 이전으로 감영 건물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짐으로써 역사적으로 호서 중심 도시의 위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안타깝다. 그나마 백제시대의 왕성이자 한때 호서의 최고 관청이 들어섰던 공산성이 대한민국 사적 제1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로 아쉬움을 달랜다. 감영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공산성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 p.57, 「충청도의 중심이 되다」 중에서
관찰사가 수행하는 중앙 조정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앙정부의 일을 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방 상급 기관으로서의 일이다. 중앙정부의 일을 대리하는 것으로는 도내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관리하는 감창監倉, 백성을 평안히 살게 하는 안집安集, 조세로 걷은 곡식과 공물을 한양으로 옮기는 전수轉輸,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勸農 등이 이에 속한다.
지방 상급 기관으로서 수행하는 일은 관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거나 선발하고 향교를 지원하여 학문을 권장하는 관학管學, 관내의 죄인과 감옥을 관리해 법의 엄중함을 보이는 형옥刑獄, 군사의 징발 및 훈련을 실시하고 무과의 향시를 주관하는 병마兵馬 등이 있다. 특히 유사시 군사를 동원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거나 역모를 진압하는 등 군 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관할 도내에서 민사와 군사에 관한 여러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상당한 권한이 주어졌다.
--- p.65, 「관찰사와 감영의 변천」 중에서
이렇게 부임하는 관찰사마다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유난히 충청도 지역의 조세 부담이 불균등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의 태안·서산·당진·홍성·예산·보령·아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내포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조세 부담이 심했다. 땅이 넓고 기름진 데다 두 차례의 전란에도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아 피해가 덜했으며, 해산물이 풍부하고 해로를 이용한 조운이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1634년(인조 12)에 이루어진 토지 조사 사업인 갑술양전 실시 후에도 내포 지역의 불합리한 조세 부담은 바로잡히지 않았다. 그 결과 대동법이 실시되기 직전까지 충청도는 다른 도보다 지나치게 높은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전라도와 비교해 충청도는 같은 면적에서 대략 네 배에 이르는 공물을 바쳐야 했다.
--- p.90~91, 「국가 재정을 위해 세곡을 거두다」 중에서
영조는 세종 때의 제도를 모방하여 동으로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과 경희궁, 관상감, 개성, 강화도, 그리고 8도에 배포했다. 그리고 감영마다 강우량 기록을 중앙에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나라 기상관측사의 재개를 알렸다. 정조대에 수원과 광주廣州에도 추가로 설치하며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우량을 측정했다. 이때 설치된 측우기는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우량 측정 기구로 20세기 초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해 기상관측을 시작할 때까지 사용됐다. 1770년 이후 약 140년간 서울에서 관측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해 210년 이상 기록한 것으로 세계 최장의 관측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원형이 남아 있는 측우기는 공주의 ‘금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 p.98, 「농사를 권장하고, 인재를 기르다」 중에서
조선 개국 초기 유력한 새 도읍 후보지였던 계룡산은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닭벼슬’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늘이 달린 용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뜻에서 계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의 국가 제사처로 계룡산이 등장한다. 신라는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부악산(지금의 팔공산)의 5악을 두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여기에 서악으로 계룡산을 포함한 것이다.
이처럼 신라가 5악에 대한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삼국을 통일한 후 점령 지역에 널리 퍼진 반신라적 민심을 누르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5악에 대한 국가 제의는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산천에 관작官爵을 주는 봉작을 행하고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 제의를 더욱 정비했다. 각 지역의 주요 산에 나라를 수호하는 명산이라 하여 소사로 정하고 매년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렸다. 계룡산 신당을 국가 품격에 맞게 격상해 ‘중악단’이라 한 것은 조선시대에 상악이 묘향산, 중악이 계룡산, 하악이 지리산이었기 때문이다.
--- p.126~127, 「신령한 산 계룡에서 평안을 빌며 제를 올리다」 중에서
마곡사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백범 김구 선생과의 인연이다. 그는 1896년,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라는 자를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라 생각해 살해한 죄로 인천형무소에 갇혔는데 탈옥하여 마곡사로 피신했다.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1898년 백범 김구는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으며 출가했는데 당시의 심정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훗날 광복이 된 후 김구는 마곡사를 다시 한 번 찾았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그가 삭발했던 바위가 남아 있으며, 이 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있다.
--- p.147, 「공주 문화의 또 다른 축, 공주의 절들」 중에서
현물로 바치는 진상품은 그 품질이 최고 수준이어야 했으므로 품질 검사가 엄격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상품의 상당 부분이 부패하기 쉬운 식재료인 탓에 이를 조달, 관리하는 일이 까다로웠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로 백성은 한층 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안면도의 생전복 진상 건으로 정조가 화를 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본래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특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예헌’을 의미했던 ‘진상’은 그 폐단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더해져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p.155, 「왕에게 바치는 예물, 진상과 충청감영」 중에서
실록은 인조가 공주에 머문 14일부터 17일까지 모두 “임금이 공주에 있었다.”로 시작했고, 공주를 떠난 18일은 “대가가 공주에서 떠났다. 대장 신경진이 서울에서 와서 그의 군사로 호위했다.”라고 기록하여 인조의 행적을 확인하고 있다.
산성의 높은 곳에 올라 금강을 바라보며 인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승전보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자신의 자리에 대한 위기감과 믿었던 공신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궁궐을 휘감은 불길이나 분노에 찬 백성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허망한 마음을 달래준 것이 공산성의 높은 자락에 있는 두 그루의 고목이었다. 이괄의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도성이 있는 북쪽 하늘을 말 없이 바라보던 자신의 곁을 지켜준 이 나무들에 정3품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의 작위를 내리고 금대를 하사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쌍수’라 했다.
--- p.188~190, 「인조의 공주 파천」 중에서
심한 박해에도 천주교의 전파는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유구, 신풍, 사곡, 정안, 반포 등 공주 인근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숯을 굽거나 옹기를 구으며 일종의 신앙 취락을 형성했다. 박해로 피바람이 거세질수록 천주교인들은 산골로 숨어들어 공동체를 이루며 신앙을 지킨 것이다. 그 가운데 수리치골(현 신풍면 봉갑리)은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숨어 지내던 곳이다. 1846년 11월 이들은 한 오두막에 모여 최초로 ‘성모성심회’를 조직했다. 이후 1861년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들이 관할 구역을 재정비하면서 공주와 그 인근 지역을 ‘성모 영보’ 구역으로 선포해 박해 중의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기도 했다.
이렇게 숨어서 신앙을 지켜나가던 천주교 신도들은 발각되면 충청감영이나 공주 진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 공주 향옥에 수감되어 끝내 참수를 당하거나 교수형을 당했던 것이다.
--- p.204,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든 황새바위」 중에서
4만 명에 이르는 대부대를 이룬 동학농민혁명군은 ‘호서의 요충’이자 ‘호남의 관문’인 공주를
공략하기로 했다. 충청감영이 자리한 공주를 장악하면 한양으로 향하는 데 전략적 거점을 확보함과 동시에 1차 봉기 때 전주성을 점거하고 중앙정부와 화약을 맺은 것처럼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전봉준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임금을 핍박하고 국민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며 일본군을 함께 몰아내자고 요구했다. 2차 봉기에 즈음해서 전봉준은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관과 농민군, 유생들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자.”라는 제의를 해서 호응을 얻었다.
--- p.220, 「우금티 마루에 펄럭이는 피에 젖은 깃발」 중에서
백성의 의리를 다하기 위해 항일 투쟁에 몸을 사른 의병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열거할 수 있을까. 공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일어섰던 의병들은 1909년에 있었던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 목숨을 잃으며 희생되었다. 그 숫자만 해도 무려 1만 7,000여 명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서 독립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남은 세력은 만주나 연해주로 옮겨가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각지의 독립군 조직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이들 의병의 피와 땀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독립전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없는 나라였던 조선은 열강의 힘겨루기 틈에 끼어 결국 아픈 역사를 남겼다.
--- p.247, 「의를 세우고자 일어난 공주의 의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