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효재 선생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에 돌아와 어느 학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가족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가족 연구를 시작했을 때 가족은 자연스레 생기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사회학이 되느냐고 남성 학자들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족이야말로 사회 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대상이라 믿었다. 가족이 민주화되어야만 여성들의 삶이 평등해지고 사회가 민주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연구를 시작으로 여성들의 역사와 여성 차별의 구조를 밝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한국 최초로 여성학 교육 과정을 대학 내에 설치하고 여성학 이론을 현실 운동에 결합시켜 해방 이후 여성 운동의 큰 줄기였던 가족법 개정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정신대대책협의회 결성 등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이이효재 선생님은 여성 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평생을 살았다.
--- p.12, 「프롤로그」 중에서
이이효재의 제안으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에 동참할 인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조한혜정, 고은광순, 김신명숙 등 100명을 넘어 170명이 모였다. 이 운동이 시작되자 보수 언론과 온라인상에서 노골적인 조롱과 빈정거림이 도를 넘을 정도로 쏟아졌다. 변소, 방구, 임신, 피박, 추남씨 등이 등장할 거라느니, 세대로 내려갈수록 한없이 긴 성씨가 등장할 것이라는 둥, 잘난 년들이 잘난 체한다는 욕설까지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성만을 쓰고 있었음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 운동은 여론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고, 자연스럽게 호주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999년 5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는 전국 50여 개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호주제 폐지 운동 본부를 발족시켜 호주제 불만 및 피해 사례 신고 전화 운영, 각종 거리 캠페인,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 p.26, 「지금부터 제 이름은 이이효재입니다」 중에서
“여성 해방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독립하고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도 사회인으로서 결혼, 가정, 또는 사회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그 관계에서 떠날 수 없다.
여성의 인간화는 이 속에서 모색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해방의 뜻은 여성에 대한 고정된 관념과 제도적인 역할이나 이에 따라 구속되어온 인간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제한된 낡은 것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의 재형성이다. 이것은 물론 여성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남성과 함께 노력하고 성취해야 할 과업이다.
다만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행동하며 살아온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이것을 의식하고 더욱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성 해방 운동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여성들의 능동적인 몸부림이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해방 운동이다.”
--- p.124~125, 「소외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여성 사회학의 설립」 중에서
1990년, 정신대대책협의회를 발족시킨 뒤 활동가들은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 쳐도 한국 정부의 태도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이이효재와 윤정옥은 이 문제를 가지고 외교부를 찾아갔다. 그 당시 정부를 대변하여 면담에 응했던 외교부의 관료는 나중에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국장이었다.
“이 문제는 한일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입니다. 요즘 겨우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한일 관계가 다시 어그러지면 안 됩니다.”
이이효재는 그의 답변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한국 외교관이오, 일본 외교관이오?”
--- p.222~223, 「일본군의 파렴치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