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에서 열세 살 사이에 나는 양탄자 위에 큰댓자로 누워서 세계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여행하고 싶은 욕구가 절로 솟아났다. 바나트나 카스피 해, 카슈미르 같은 지역과 그곳의 음악, 거기서 마주치게 될 눈길,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생각들을 꿈꾸었다……. 이 억누르기 힘든 욕망, 그걸 뭐라 불러야할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무엇인가가 점점 더 커지다가 어느 날인가 닻줄이 풀리면, 반드시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떠나고 보는 것이다."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는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빈둥거리며 나태를 부리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농사를 짓는 이슬람교도 아낙이 양파 바구니 사이에 있는 긴 의자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얼굴이 얽은 트럭 운전수, 잔을 앞에 두고 꼿꼿한 자세로 이쑤시개를 만지작거리거나 펄쩍 뛰어 일어나서 담뱃불을 붙여주며 대화를 하려고 애쓰는 장교도 있었다. 그리고 매일 밤, 문 옆 탁자에서는 젊은 매춘부 네 명이 수박씨를 잘근잘근 씹으며 열정적인 아르페지오로 아코디언 주자가 새로 산 악기를 어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근처 둑에서 영업을 하고 온 날이면 그들의 매끈하고 예쁜 구릿빛 무릎에 흙이 살짝 묻어있기도 했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서는 피가 빠르게 맥박쳤다. 그들은 순식간에 잠에 곯아떨어졌고, 잠이 들면 놀라울 정도로 어려 보였다. 그들이 이따금씩 규칙적으로 숨을 내쉴 때마다 자주색이나 초록색 면직 옷에 덮인 옆구리가 들어올려지곤 했다. 몸을 부르르 떨거나 듣기 거북한 소리로 마른기침을 하다가 갑자기 톱밥 속에 침을 뱉는 그들의 거칠고 요란한 매너가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필요하다면 빗자루를 타고서라도."
"도시란 피가 흐르고 고약한 냄새를 풍겨야만 치료되는 상처와도 같으며, 그 진한 피는 어떤 상처라도 아물게 할 수 있다. 이 강이 이미 주었던 것은 이 강에 아직 부족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아직 좋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내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하루가 끝나간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실컷 얘기를 나누었다. 여행은 엔진 소리와 스쳐가는 풍경에 실려와서 당신의 몸을 관통하고 당신의 머리를 환하게 밝혀준다.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생각은 당신을 떠난다. 반대로 다른 생각이 새로 정리되어 강 밑바닥의 조약돌처럼 당신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도로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한다. 도로가 제 할일을 다 하여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인도 끝까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죽음까지 그렇게 뻗어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상상력과 집중력만 발휘하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도 여행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 그런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구체적으로 공간 속을 옮겨 다니며 움직이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세계는 약한 사람들을 위해 넓게 펼쳐져 그들을 받쳐준다. 어느 날 밤 마케도니아로 가는 도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왼쪽에 떠있는 달과 오른쪽에서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라바 강으로 세계가 이루어지고, 앞으로 3주일 동안 살 마을을 지평선 뒤쪽으로 찾으러 갈 계획을 세울 때, 나는 내가 그런 것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여행은 몸을 털고 일어나 기운을 차릴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종의 축소를 경험하게 해줄 뿐이다.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습성을 박탈당한 여행자는 마치 포장지가 벗겨지듯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좀 더 왕성한 호기심과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게 되고, 첫인상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 도시를 뒤덮어버린 무르익은 금빛 가을이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떠돌아다니며 살다 보면 계절에 민감해진다. 계절에 의지하고, 계절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장소에서 자신을 억지로 떼어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고 아무리 빵을 씹어도 안 넘어가고 목에 걸리는 순간이 있다. 지독하게 피곤하거나, 너무 오랜 만에 혼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미친 듯이 열광했다가 일순 낙담하는 그 순간, 두려움은 마치 차가운 물에 샤워를 했을 때처럼 길을 돌아서는 당신을 덮친다. 다음 달에 대한 두려움,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움직이는 건 뭐든지 다 위협하는 개들, 조약돌을 주어들고 당신에게 다가오는 방랑자들, 심지어는 이전 숙박지에서 빌린 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속셈을 감추고 있던 난폭하고 못된 인간."
"시간은 끓고 있는 차가 되어,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이 되어, 담배가 되어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동이 튼다. 점점 더 밝아지는 빛이 메추라기와 자고새의 깃털을 비춘다……. 그러면 나는 언젠가는 되찾으러 갈 기세로 이 경이로운 순간을 내 기억의 밑바닥에 서둘러 파묻는다. 기지개를 켜고 몇 걸음 걸으면 ‘행복’이란 단어가 내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게 느껴진다.
결국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일도 아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도 아니다. 사랑보다 더 평온한 초월적 힘에 의해 고양될 때의 순간이 내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삶은 그같은 순간을 인색하게 나누어준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은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