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인생은 1928년 8월 6일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츠버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수도시설도 없는 지독히 허름한 빈민가의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있는 슬로바키아 북동부의 외진 산악지대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온 이민자이다. (…) 앤디는 금발에다 허약했고, 걸핏하면 아팠다. 여덟 살 때는 시드남 무도병Sydams chorea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신경질환의 일종으로 주로 류마티스성 열에 의해 생기는 이 병 때문에 거의 일 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머니와 아주 가까워졌다.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에 줄리아는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했으며, 만화책, 색칠하기책, 영화잡지 등을 사주었는데, 그것들 모두 훗날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 p.8
워홀은 할리우드에 대한 사랑을 갖가지 방식으로 드러냈다. 그의 사무실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컬러사진과 함께 언론보도 사진에서 스크랩한 방대한 컬렉션에서 뽑아낸 슈퍼스타들의 이미지를 네 가지 색으로 확대, 병렬하는 방식으로 장식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타 가르보, 브리지트 바르도의 이미지가 특히 많았다. 그의 컬렉션에는 골동품상점에서 구입한 할리우드 전기물 여럿과 커다란 스크랩북 세 개,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무대와 영화 속 스타들의 사진이 있었다. --- p.16
찰스 리센비는 〈샘이란 이름의 고양이 25마리와 한 마리 파란 고양이〉(1954)의 본문을 썼는데, 내용이라고는 줄리아 워홀라의 드로잉들은 《앤디 워홀의 어머니가 그린 거룩한 고양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무지개색 페이지에 인쇄되었다. 《골드 북》(1957)은 20페이지 중 14페이지는 금박이고, 나머지 페이지들은 흰색 바탕에 손으로 채색되었다. ‘황금 그림Golden Pictures’ 콜라주를 제작한 시기에 만든 섬세한 드로잉들이 실렸는데, 주로 에드워드 발로비치의 사진을 바탕으로 했다. 아이가 혼자 있거나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 잠을 자는 여인, 묵주를 움켜쥔 손, 세 명의 젊은 남자, 남자의 둥그런 엉덩이, 과일, 꽃 등의 이미지가 실렸고, 마지막에는 모양과 배경을 다양하게 뒤바꾼 아홉 켤레의 구두 그림이 있다. --- p.68
사람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록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밴드라고 말하지만, 이 무렵에는 아직 히트 앨범이 없었다.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된 이 록밴드는 뉴욕의 의기양양한 도시형 인간부터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은 캘리포니아 사람까지, 주요 멤버는 기타 연주자 루 리드와 스털링 모리슨, 비올라 연주자 존 케일, 그리고 드러머 모린 터커였다. (…) 당시 록 밴드를 찾고 있던 워홀이 몇 주 뒤 카페 비자르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공연을 본 후 그들에게 적극적인 후원을 제안하면서 매니저 겸 후원자가 되었다. --- p.72
미인, 스타일, 패션에 대한 워홀의 열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의 잡지 《인터뷰》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보급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책의 많은 부분이 광고와 부유층, 패션과 유명 인사들에 할애되긴 했지만 《인터뷰》의 핵심은 대중문화를 찬양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명성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워홀의 신념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 p.84
1970년대 후반에 워홀은 다시 록 뮤지션을 홍보하는 일로 돌아와 전자 바이올린 연주자 월터 스테딩의 레이블 ‘이어홀Earhole’을 홍보했다. 스테딩은 뉴욕의 펑크 명소들 가운데 하나인 에서 자주 연주했으며 그곳에서 블론디, 수이사이드, 레이먼즈를 위한 공연을 했다. 훗날 그는 블론디와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블론디의 리드 보컬 데비 해리도 워홀의 가까운 친구였다. 워홀은 해리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과 컴퓨터(그는 잠깐 동안 디지털 아트를 시도했다)로 제작했다. 그녀는 《인터뷰》의 표지에 등장했고, 워홀의 쇼에도 출연했다. --- p.94
많은 젊은이들이 워홀을 디딤돌로 여겼고, 그는 그가 청년시절에 받았던 것처럼 그가 접촉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면서 용기를 북돋았다. 1966년 로드아일랜드 스쿨의 디자인 미술관에서 멀티미디어 쇼 〈피할 수 없는 플라스틱 폭발〉을 공연한 뒤 학생들을 그의 팩토리로 초대했다. 그리고 사흘 뒤 니키 카슨이 그 무렵 학교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가지고 왔고, 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워홀을 찾아와서 충고와 비평을 들었다. (…) 1982년 바스키아는 워홀을 처음 만난 지 불과 몇 시간만에두 사람을 그린, 채 마르지도 않은 초상화를 들고 팩토리에 나타났다. 그는 나중에 운동복 차림에 아령을 든 자신의 멘토의 전신상을 그렸으며, 워홀은 바스키아가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는 모습을 그렸다. 워홀의 기법과 이미지는 바스키아가 추?화한 전기 의자를 실크스크린으로 뜬 일련의 회화에 차용되었다. 워홀이 바스키아의 1984년 뉴욕 전시회 카탈로그를 베낀 것에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라고 적혀 있으며, 당시 두 사람은 1985년부터 여러 점의 회화를 공동으로 작업했다. 두 사람은 전시회 포스터를 위해 권투선수처럼 포즈를 취했다.
--- p.11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