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중생과 성령 세례는 전혀 다르다. 성령 중생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받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받는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에 성령 중생을 한 후,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로 성령 중생을 한 후,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볼로의 전도로 성령 중생을 한 후, 바울의 안수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 지금도 성령 중생을 한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중생이 성령 세례다”라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닐 수밖에 없다.
--- p.26∼27
사람이 사모해서 성령 중생을 받는 경우는 전혀 없다. 성령 중생은 성령님의 일방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사람의 죽은 영을 일방적으로 살리는 것이 중생이다(엡 2:1). 반면에 성령 세례는 성도가 사모할 때에 받는다. 어떤 성도들은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사모해서 성령 세례를 받고(120문도들처럼), 어떤 성도들은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모르고 막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넬료처럼). 성령 세례(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데도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는 한 사람도 없다.
--- p.35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오순절에(혹은 그 후에) 성령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오래전에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게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 중생이 성령 세례인 것을 의미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 중생이 성령 세례가 아닌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베드로가 성령 중생이 성령 세례가 아닌 것을 명백하게 증언한 것을 알 수 있다!
--- p.87∼88
성령님이 창세전에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에게 구속사를 적용하기 위해서 하시는 특별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령 중생이요, 둘째는 성령 세례다. 성령님은 이 두 가지의 특별한 일을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각각 적용하신다. 성령님은 120문도들을 먼저 중생시키신 후에(마 16:16)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셨다(행 2:1-47). 성령님은 빌립을 통하여 사마리아 성도들을 먼저 중생시키신 후에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령 세례를 주셨다(행 8:1-25). 성령님은 아볼로를 통하여 에베소 성도들을 먼저 거듭나게 하신 후에 바울을 통하여 그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셨다(행 19:1-7). 성령님은 그 이후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지금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사이클 이론을 내세워서 “성령 세례는 오순절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닐 수밖에 없다. 성령 세례는 오순절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있을 것이다.
--- p.99∼100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령 세례를 사모하는 신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점이다.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신실한 신자는 성령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에게 박해를 받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가? 지금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신자가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은 사실을 감추고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열심을 내서 주의 일을 하는 신자는 반드시 불신자들과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또는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을 몰라서 성령을 소멸한 신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 p.109∼110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똑같은 시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처럼 예수님을 믿자마자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행 10:44-46), 바울 사도처럼 예수님을 믿고 얼마 동안 지난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있고(행 9:17),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오랜 시일이 지나서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행 19:6). 성령 세례 연속론을 부인하는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도 각자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안수를 받는 중에 성령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 중에 성령을 받기도 한다.
--- p.116
물론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충성스러운 아볼로처럼 교회에 상당한 유익을 줄 수 있다(행 18:24-28).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과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의 사역 능력과 사역 열매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사도들이 성령 받기 전에 사역한 것과 성령 받은 후에 사역한 것에 큰 차이가 났던 것이 증거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낸 경험이 있는 사도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고 주의 일을 하라’(행 1:4)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사도들이 성령을 못 받은 신자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게 도와준 것이다(행 8:14-15, 19:1-6).
--- p.146
성령 세례는 권능을 주는 것일 뿐(행 1:8), 성숙한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성령 세례를 받고도 신앙생활에 실패한다.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많은 성령 은사를 받고서도 타락한 신앙생활을 한 교회로 유명하다.
--- p.179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의미한다(갈 5:22-23). 성령을 받은 성도가 성령 열매 맺기를 힘쓰면 신앙 인격이 빠르게 성숙해진다. 반면에 성령 열매 맺기를 게을리하는 성도는 자신과 이웃에게 많은 해를 끼치게 된다. 만일 어떤 성도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산을 옮겨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고전 13장). 또한 만일 어떤 성도가 성령 열매를 맺는 일을 뒷전으로 하고 제멋대로 살면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 열매를 맺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성령 은사를 행하는 일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는 물론 사회에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실패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면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 p.181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은 그의 마음 근처에 와서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하늘에서 충분히 내려오시지 않고, 여전히 하늘에 정주(定住)하고 계신다. 오직 성령 세례를 받는 성도에게만 성령님이 하늘에서 충분히 내려오셔서 그의 마음속에 영원한 내주를 시작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생한 사도들에게 “장차 성령이 너희 속에 들어가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성경이 “성령이 신자들에게 내려오셨다”,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 p.233
차영배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아야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지만 성령 충만을 받을 수는 없다. 술을 조금 마신 사람과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다르듯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신자와 성령 충만한 신자는 능력과 지혜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가 성령 충만을 기대하는 것은 술을 조금 마신 사람이 술에 취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중생한 신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기 힘써야 하고,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성령 충만 받기를 항상 힘써야 한다.
--- p.237
신약성경에는 성령 소멸의 예가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성도들은 성령을 소멸하여 타락한 실례(實例)다. 고린도전서 5장 1-5절에 기록된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신자’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도 좀처럼 범하지 않는 무서운 죄를 지으면서 살았다. 그 결과 그의 육신이 사탄에게 넘겨져서 멸망(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전 5:1-5). 이처럼 성령 세례를 받은 신자가 경건 생활을 등한히 하거나 성령님을 무시해서 죄를 지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성령 소멸’이라 한다. 예수님도 성도가 주님께 협력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성도의 중심에 들어오시지 않는 사실을 증언하셨다(계 3:19-20). 성령 소멸이 심해지면 성령 세례를 받은 신자도 크게 타락할 수밖에 없다.
--- p.250∼251
성령 열매는 성령 은사와 성격이 다르다. 성령 은사는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지만, 성령 열매는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 은사인 방언과 성령 열매인 사랑을 비교해 보면 필자의 말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방언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할 수 있지만, 사랑은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예에서 보듯이, 성령 은사를 아무리 많이 받아도 성령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성령 받은 성도라도 성령의 일을 무시하고 육신의 일에 사로잡혀 있으면 성령 열매를 맺을 수 없다(갈 5:19-21). 성도가 성령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가 행한 은사는 그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전 13:1-3). 그러므로 성령 은사를 행하는 것보다 성령 열매를 맺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p.311∼312
성령으로 중생하기만 한 성도들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던 사도들과 같다. 이런 성도들은 지나치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령 중생한 성도들이 성령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더 나가서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고, 항상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성령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성령 열매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성령 은사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큰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성령 열매 맺기를 힘써야 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부도덕하게 생활하는 것 때문에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면 그렇지 않은 성도에 비하여 훨씬 많은 성령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 세례를 받기 전의 사도들과 성령 세례를 받아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하게 되려면 기도 생활, 말씀 공부, 찬송 생활, 봉사 활동, 의롭게 살기 등에 힘써야 한다. 바울 사도의 표현처럼 자기 몸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고전 9:24-27). 이것에 힘쓴 만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