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나는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것이 “간단한” 생각이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가장 확실한 것을 선택했다. 바위와 우리의 애완용 쥐. 나는 나중을 위해 애매한 부분을 없애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섯 살 다넬은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넬은 우리를 놀리는 걸까? “바위들 또한 변하고, 바위들은 움직여요.” 다넬은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면서 내가 바위가 어떻게 빙하와 함께 떨어져 내렸고, 그것들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어떻게 모양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한 것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다넬은 일부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같은 내용을 재연하고, 큰 바위에서 작은 바위들이 분리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논쟁에서 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정돈된 도표라는 게 참 그렇다.
우리가 “설명”으로 대화를 차단하는 대신에 바로 그런 생각들 속에서 중요한 발견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애교 같은 실수, 무지의 우연성을 묵살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와 무지의 우연성은 지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의 핵심이다.
--- pp. 30-31
학생들 대다수는 아프리카계와 라틴계이며, 대부분이 저소득층이거나 빈곤층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범위에 걸쳐 학업의 장점과 불리한 조건들을 경험한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센트럴파크이스트 초등학교에서 첫 7년 동안 배출한 졸업생 중 85%가 고등학교 정규 졸업장을 받았다. 또 다른 11%는 검정고시(GED)를 통과했다. 이것은 뉴욕시 전체 고등학교 학위 수여 비율인 50%와 비교된다. 게다가 우리 자체의 중등학교인 센트럴파크이스트 중등학교를 개교하기 전 다른 고등학교를 통해 졸업한 우리 초등학교 출신 학생들 중 2/3가 대학에 진학했다. 이러한 통계는 인종과 계급의 구분을 넘어 지속되었다. 1991년, 센트럴파크이스트 중등학교는 이러한 인상적인 성과를 능가했다. 몇몇 소수의 학생들이 전학을 가기도 했지만, 우리와 함께 시작했던 9학년 학생 중 도중에 그만둔 학생은 5%에도 못 미쳤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 대부분은 정규 졸업장을 받고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90%는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여 계속 대학을 다녔다. 1991년에 보여준 수치는 매번 이어지는 졸업생들에게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1994년 졸업생들은 학업성취와 진학한 대학의 질적인 측면에서 선배들을 능가했다.
--- pp. 52-53
우리가 시험으로 부과하는 “성취 기준들”이라는 개념을 반대하는 아주 강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험에 의해 부과되는 성취 기준들은 표본상의 근거로 주로 사용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저부담(lowstakes) 시험들이라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취 기준들은 성적에 따른 반 편성, 취업, 학교 책무성, 그리고 교사 임금을 결정하는 데 동시에 사용할 의도가 있는 고부담(high-stakes) 평가들로 제안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험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부정행위를 하게 만든다. 어떤 시험 체제도 부정행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시력 검사도 속인다. 나는 시험에 대한 대화가 시험의 일부라는 것을 좋아한다(이 때문에 센트럴파크이스트 중등학교의 체제를 좋아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험을 개정하고 있고, 그 부담은 결코 높지 않다. 또한 시험은 언제든 다시 치를 수 있다.
--- pp. 100-101
우리는 교사가 하는 일을 하찮은 정보를 수집하는 학생들의 능력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지성적 마음의 습관에 따라 교사가 하는 일을 평가하고자 한다. (……)
우리는 여러 교과를 넘나드는 통합 교육과정을 창안하고, 낮은 학년들에서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본질적 요소들에 초점을 둬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센트럴파크이스트 중등학교 마음의 습관”(CPESS Habits of Mind)을 서둘러 만들었다. (……) 마음의 습관은 학생 수행을 판단하기 위한 토대일 뿐만 아니라 각 교육과정의 핵심을 이룬다. (……) 이 다섯 가지 습관들은 다음과 같다. 증거에 대한 질문, 즉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모든 다양성 속에서 관점에 대한 질문, 즉 “누가 말하고 있을까?”, 연관성과 패턴에 대한 탐구, 즉 “어떤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추정하기, 즉 “어떻게 상황이 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중 어떤 것이 중요한 이유, 즉 “누가 관심이 있을까?”
--- pp. 109-111
사이저는 우리가 학교를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시간표를 단순하게 편성하세요. 그러면 아이들의 복잡한 특성과 그들이 처리하고 있는 생각의 복잡성에 집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과감하게 중등학교 시간표를 우리 초등학교 시간표와 가깝게 편성했다. 센트럴파크이스트 중등학교는 매일 인문학(예술, 역사, 문학, 사회 탐구) 2시간, 수학과 과학 2시간, 담임 시간 1시간이라는 가장 단순한 시간표를 편성했다.
--- p. 119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극적인 변화를 목격해왔다. 어른들이 벌이는 논쟁이 학생들에게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교직원 능력개발” 활동과 학생을 교육하는 활동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상호 존중을 최우선에 두고 다양성과 의견 차이의 풍토를 격려하는 가치 체제에 깊이 몰입하는 과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나게 강해진다. 이는 교직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우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안다. 이는 전염된다.
--- p. 126
배려와 동정심은 안이하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목적이 아니다. 배려와 동정심은 우리가 가르칠 책임이 있는 핵심 주제들의 일부이다. 잘 알고 능숙해진 배려는 학습된다. 배려하는 것은 정서적인 것만큼이나 인지적인 것이기도 하다. 세상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는 능력은 감상에 빠지지 않는 동정심의 중심이고, 지적 회의와 공감 모두의 근원이다. (……)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런 자질은 정확히 의도적인 함양, 즉 학교교육을 요구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이런 습관이 민주적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려면, 우리 학교는 의식적이고 엄밀히 이러한 도덕적이고 지적인 기본 원칙을 함양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 pp. 133-134
서로 얼굴을 맞대고 거듭되는, 이런 지속적인 대화는 교육에 기여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교직원 능력개발의 주된 방식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우리가 신입 교사를 어떻게 “훈련시키는지”를 질문할 때, 나는 학교 자체가 아이들과 교직원을 위한 교육자라고 답한다. 학교는 그 자체로 교직원 능력개발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 학생들뿐 아니라 외부 사람들도 이러한 프로젝트에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학교 그 자체는 공적 숙의(deliberative) 기관이다. 숙의 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은 추론하기, 성찰하기, 평가하기, 변경하기, 그리고 계획하기의 힘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장려하는 마음의 습관, 우리의 다섯 가지 본질적인 질문, 그리고 작업의 습관
은 교직원의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전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 p. 205
우리가 서로의 견진성사(confirmations)뿐만 아니라 장례식에 참석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새 옷을 마련할 때뿐만 아니라 생일과 결혼식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충분히 작은 학교가 필요하다. 우리가 전문용어로 “연계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에 투덜대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대신에 아이들이 학년이나 학급을 옮길 때 교사들이 서로를 도와주고 아이들도 도와주는 방법에 대한 비결들과 생각들을 열정적으로 쉽게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학교가 필요하다.
--- p. 213
학교는 배움에 대해 배우는 실험실이어야 한다. 학교가 반성적 실험의 장소로 운영될 때에만 아이들과 교사들 모두 동시에 배울 수 있다(존 듀이의 유명한 시카고대학교 부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이름이 실험학교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는 아이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교사들 사이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창조해야 한다.
--- p. 260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다섯 살짜리 아이들은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때 가장 잘 배운다(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에게는 화장실 가는 것이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 10대 아이들에게는 어떤가? 교사들에게는 어떤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에는 “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포함된다. (……) 어른들이 무섭게 보이는 환경에서는 청소년에게 필요한 적절한 반항이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시험하는 것”은 한계를 정할 준비가 된 어른들이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50세라고 아주 다를까? 우리는 모두 안전하고, 예측할 수 있고, 자기편인 일터가 필요하지 않을까?
--- pp. 277-278
일단 우리가 학문의 세계를 단지 지적인 생활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인정하면, 우리는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다른 가능성들은 모든 전통적 교과들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 가능성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교과들이 우리의 탐구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전통적 교과를 지적인 탐구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무엇을 공부할지 결정하는 것, 가장 영향력이 큰 기준은 학문 세계의 필요가 아니라 민주적 시민들의 요구들이어야 한다.
--- p. 306
변화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잃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강력한 미국을 건설한다거나 일본을 물리친다는 것, 심지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직업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강력한 시민과 더 배려하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많은 것을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 아이들을 주제로 한 논쟁이자 그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공유한 미래를 주제로 한 논쟁이다. 이것은 논쟁할 만한 가치가 있다.
--- p.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