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생각된다. 그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토요일 저녁에 가지 못하고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에게 찾아갔다. 작섬 집의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머니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나씨 부인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담배를 피워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속되는 푸념과 욕지거리는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고, 어머니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나씨 아주머니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있거나 무슨 일로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웠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내가 어머니에게 가까이 가자 어머니는 그제야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 그리고 그 이지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던 그때의 아픔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려앉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나는 어머니를 꺼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의 저고리는 뽑힌 머리 카락들로 어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한 줌씩이나 빠져 있었다.

● 내가 아는 김경모<br/><br/>나는 김경모씨의 청소년기를 조금 알고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나는 20회요, 김경모씨는 21회이니까 내가 선배인 셈이다. 우리는 작도리, 서너집 건너에 산 이웃이었다. 얌전한 체 하면서 힐끔 훔쳐본 그의 모습은 구부정한 어깨에 과묵하고 우울한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에서는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 <br/><br/>서호진 작도리, 흥성거리는 어시장에다 여건이 좋은 해수욕장이 있어서 일견 낭만적인 곳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겨울 명태떼기의 험악하고 냉혹한 광경, 저녁이면 뱃사람들과 작부가 어울리는 젓가락 장단에다 노랫가락이 골목을 적시고, 그리고 끊임없는 싸움질이 이어지고....... 매스컴을 통해 도덕과 윤리를 역설하던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br/><br/>"거기에는 질서,풍요,안정이 있다. 그래서 평화롭다. 여기에는 무질서,가난,불안이 있고 갈등이 있다. 나는 이런 갈등 속에서 회의와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여기를 선택했다. 나는 여기가 좋다." 서민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그 복판에서 청년 김경모씨는 무엇을 느끼면서 살았던가, 그의 일생은 청소년기의 이미 솟구치고 있었던 회의와 충동의 연속이었으리라, 나는 벌써 성공적인 김경모씨의 사업 추진과 그 저력에 감동하고 있었거니와 불쑥 내놓은 3권 분량의 자전소설을 보고 경악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에서이다.<br/><br/>첫째, 스스로 썼다는 것이다.<br/>고희가 되면 누구나 뒤를 돌아보게 되고 자서전 한 권쯤은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개는 꿈으로 끝나고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전문적인 문필가를 시켜서 그럴싸하게 꾸민다. 그러나 스스로 쓴 이 자전소설『함경도 아바이』를 볼 때 김경모씨의 문장력은 중년에만 시작했어도 작가로 성공했으리라 믿어지는 수준이다. 하지만 자전소설이기에 아마 추어다운 소박함과 질박함이 더욱 맛이 있고 친근함을 주고 있다. 미사여구에 식상된 독자에게 시원한 생수처럼 신선함을 줄 것이다.<br/><br/>둘째, 책의 분량이 나를 압도했다. 얼마나 할말이 많았던가, 책의 부피는 바로 김경모씨 인생의 무게가 아닌가.<br/><br/>셋째, 자신의 치부까지 숨김없이 진솔하게 내놓은 용기와 당당함이다. 김경모 씨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아서 숙연해진다.<br/>자전소설 제목이 『함경도 아바이』인데, 부제인 <그래도 나는 희망만을 생각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입지전적인 자서전이라기보다 청소년들에겐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양서가 될 것이다. 불우했던 소년기에선 눈물을, 학생시절의 왕성한 독서열과 학구적 자세에선 배움의 의욕을 줄 것이다. 이후 8.15해방과 6.25한국전쟁을 전후한 갖가지 수난사에선 현실 극복의 의지를, 그리고 장년기의 사업성취 과정에서는 집념과 인간애를 느끼게 할 것이다. 또한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잃은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전부를 주지 않는, 어떤 섭리를 깨닫게 하리라. 마지막으로 3권 분량의 역저를 집필한 김경모 씨의 노고를 처하하며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