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를 내려준 이 도시는 몸집이 커서 좀 게으른 그래서 등에가 자극을 주어야 하는 고귀한 말과 같은 것이다. …… 그대들은 화가 나서 나를 때리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대들은 걱정스러운 신께서 또 다른 사람을 보내시기 전까지 한평생 푹 긴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 p. 59~60
프랑스 혁명의 공포를 최초로 폭로했던 에드먼드 버크의 저작을 읽는 일은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어라!(변발을 한 버크의 전통에 대한 존중도 여기에 속한다). 이에 반해서 좌파라면 마치 추기경이 이단 사상가와 악수하는 것을 꺼리듯이, 애덤 스미스를 피해야 한다(애덤 스미스는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원조가 아니던가. 지옥으로 가라!).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나 파솔리니(자본주의에 대한 이 과격한 비판자들)에서 손을 떼라! 게다가 이 모든 성향의 사람들은 가능하면 니콜라스 고메즈 다빌라와 체스터턴을 피해가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이 두 사상가들은 쉼표 하나까지도 모두 반동적이기 때문이다.
--- p. 72~73
이 작품은 오늘날 아동 도서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오해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 시대 부패, 어리석음, 간계들에 대한 쓰디쓴 결산이다. …… 책 끝 부분에 이르면 『걸리버 여행기』는 전 인류에 대한 풍자적 공격으로까지 치닫는다. 스위프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마지막 여행에서 보게 되는 것은 호이흔흠이라고 불리는 고귀한 말들이 교양 있는 담화를 하고, 야후라고 불리는 인간들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똥으로 몸에 범벅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 p. 104~106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자. 거기에는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있다. 그는 좌우에 지팡이를 짚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앞의 빛을 바라본다. 고야는 그 노인의 머리 위에 커다란 글씨로 스페인 단어 두 개를 적어놓았다. An aprendo, 즉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고야는 이 그림을 그리던 때에 이미 80세였다.
--- p. 115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는 베를린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 가입했고, 그 쓰디쓴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신념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도, 반유대주의적인 전시용 공개재판도, 헝가리 봉기에 대한 잔인한 진압도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뛰어나게 터무니없는 답변을 했다.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전통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그 당시에 발전시켰던 사상도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 p. 117~118
지칠 줄 모르는 폭포수와 같은 말들을 통해 우리는 머릿속에 진공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내면에 남아 있는 이해력의 찌꺼기들도 깨끗이 치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귀를 틀어막을 수 있고, 누군가가 마치 독극물처럼 한 방울씩 통찰력을 떨어뜨려 집어넣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 p. 140~141
음모론이 갖는 커다란 장점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누구라고 하더라도, 음모론은 여러분에게 이 세상의 모든 악이 그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 음모론의 신봉자는 이 모든 악의 가면들 뒤에는 동일한 원칙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이 이미 상당히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한 문제가 우아한 방식으로 저절로 해결된다.
--- p. 154
참된 지성이라는 것은 이러한 도구적 지성의 습관적인 사슬을 끊어내는, 일종의 ‘혁명’ 같은 것이다. 참으로 창조적인 사유란 자동화된 습관을 넘어서는 것, 타인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지 않는 것, 마치 시인처럼 아무도 찾은 적이 없는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 인도의 젊은 왕자처럼 물려받은 왕국을 버리고 물러설 곳 없는 투쟁을 시작하는 것, 그리하여 막막한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서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 역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