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자기 일상에 충실한 보통 사람들, 의심과 헌신이 뒤섞인 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이 이야기에는, 드디어 아들을 얻었다는 사가랴의 기쁨이나 마을 아낙네들의 조롱에서 해방된 엘리사벳의 환희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이 이루어진 위대한 성취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큰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의 곤경과 희망과 두려움도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앞으로 누가복음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 주겠지만, 그분은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거시적 규모로 일하실 때도 그보다 작은 인간의 관심사까지 세세하게 고려하신다. 이제부터 무대 중앙을 차지할 드라마는 곧 하나님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운데 살아 온 모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게 바로 누가가 의도한 이야기다.
--- p.28, ‘눅 1:5-25 가브리엘이 사가랴를 방문하다’ 중에서
사실 세례는 유대교로 개종하기 원하는 이방인이 치러야 하는 의식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요한의 권고 자체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곤경에 빠진 건 국가 정치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곤경에 맞닥뜨려야 했다. 요한은 외적 의식에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만 이 새로운 운동을 따르면서, 자신의 진면모를 감쪽같이 숨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나님이 돌아오신다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서 만사형통일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조하고 구원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자비와 함께 심판도 가져오실 수밖에 없다. 그분은 인간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여진 하나님이 아니시다.
--- p.63, ‘눅 3:1-9 세례자 요한의 선포’ 중에서
유대교를 비롯한 예수님 시대의 다양한 분파와 집단에서, 금식은 기다림의 표시,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현재를 슬퍼하는 표시였다. 금식은 이스라엘에 몰아닥친 재난을 되돌아보면서 회개하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자비가 지금 살아서 활동하고 치유하고 축하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면서, 그것을 즐기라고 당신을 초청한다면 어떨까? 잔치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이 잔치는 결혼 피로연(다가오는 하나님의 새 시대를 나타내는 유대교의 일반적 상징)과 비슷한데, 음식을 멀리하는 것은 결혼식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잔치는 삶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어두운 분위기도 있다. 장차 신랑을 빼앗기고 다시 금식하는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두 번의 부활절 식사로 마무리되는데, 한 번은 엠마오, 다른 한 번은 다락방에서다. 신랑이 돌아오고, 그분의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새 시대가 훌륭하게 개막했음을 의미한다.
--- p.104-105, ‘눅 5:27-39 식탁 교제와 금식에 대한 질문’ 중에서
‘죄인’이란 상당히 포괄적인 범주라서, 죄인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아마도 죄인은 너무 가난해서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지키려고 노력하지 못했던 사람들일 것이다(요 7:49을 보라). 자칭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이들은 종교와는 담을 쌓은 구제불능의 사람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요구에서 동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죄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은 주인을 찾는다. 탕자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비판자들은 ‘회개’를 각자 다른 의미로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판자들에게 회개란, 그들이 요구하는 정결과 율법 준수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참 회개는 예수님과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직접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그런 암시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인데)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회개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정말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7절)이다!
--- p.265, ‘눅 15:1-10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중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그분과 맺은 순수하게 영적이고 사적인 내면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절대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이 어구는 항상 사적 경험이 아니라 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 이 어구가 ‘너희 가운데’를 뜻한다고 제안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지만, 신비롭게 숨겨져서 사람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앞의 표현보다 조금 더 근접하긴 했으나, 이 역시 정확한 의미는 아니다. ‘너희 손에 잡히는 곳 안에’라는 표현은 그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이 어구는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당신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손에 잡히는 곳 안에’ 있다. 이로써 당신은 어떤 결단,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결단 앞에 선다.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에 수수방관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당신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남긴 도전이었다.
--- p.300, ‘눅 17:20-37 그 나라의 도래’ 중에서
당신의 예수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왜 아직도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인가? 사람들은 노예 해방과 교육 확대, 병원 설립 등의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복음 때문에 매일 변화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생의 염려로 당신에게 짐을 지우려고 한다. 또 예수님의 경고처럼, 문자적이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방탕과 만취로 짐을 지우려고 한다. 그들은 당신을 기진맥진하게 해서 스스로 이상한 바보라고 여기게 만들려 한다.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구닥다리 책을 왜 공부하느냐고 따진다.
우리의 대답은 예수님이 떠나고 약 한 세대 뒤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대답과 똑같다. 깨어 있어라. 이게 당신이 기대해야 할 말이다. 인내가 열쇠다. 넘어지지 않을 힘을 구하라. 영과 정신, 감정과 신체의 피곤으로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켜떠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현실은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고 깃발이 휘날리는 짜릿한 전투가 아니라,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기도와 희망과 말씀과 예전과 증언으로 내딛는 꾸준한 걸음걸이다. 이게 중요하다. 인내가 성령의 열매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을 서로 되새겨 주라. 깨어 있어라.
--- p.365-366, '눅 21:34-38 인자를 기다리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