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그는 1835년에 토사土佐(지금의 코치 현高知縣)에서 지방무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메이지 유신 바로 1년 전인 1867년에 쿄토京都에서 암살당하기까지, 일본사 가운데서도 가장 급박한 순간을 파란만장하게 살아나갔다. 미국의 페리 선장이 일본의 개항을 노리고 바쿠후幕府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東京)에 접근한 1853년. 19세였던 그는 검술연습을 위해 머무르고 있던 에도에서 페리의 접근이 불러일으킨 혼란에 직면하여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1861년에 결성된 근황당勤皇黨에 가담, 이른바 '존황양이尊皇攘夷'(무능한 바쿠후대신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유럽 세력의 일본 침입을 저지하자는 주장)의 투사로서 행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기가 찾아온다. 즉, 유럽에 대하여 개국을 주장하던 카츠 카이슈勝海舟를 암살하러 갔던 그는, 오히려 개국의 불가피함을 역설한 카츠 카이슈의 논리에 설복되어버렸던 것이다. 이후 그는 여러 가지 실용적 지식을 익히는 한편으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를 넓혀가며 정치적 이상을 확립해 나아갔다. 그러나 자신의 후원세력인 카츠 카이슈가 1864년에 파면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사츠마薩摩(지금의 카고시마 현鹿兒島縣)로 탈출하였고,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해 행동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는 큐슈九州의 사츠마와 혼슈本州의 쵸슈長州 두 지역이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긴박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두 지역은 존황양이라는 명분에서는 동의하면서도, 그 주도권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지역이 1866년에 삿쵸薩長(사츠마·쵸슈) 동맹을 결성하여 공동전선을 펴게 된 배후에는 료마가 있었다. 삿쵸 동맹의 결성으로 반바쿠후 군軍은 바쿠후 군보다 강력한 힘으로서 에도바쿠후를 압박하여 끝내는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삿쵸 동맹 이후 계속하여 신국가구상을 만들어가던 료마는 바쿠후의 존속을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1867년에 암살되었지만, 그의 구상들은 1868년에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을 위한 지침서가 되었다.
1945년의 패전이후 현대일본은 기본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와는 정반대의 역사관을 주장하는 집단이 등장했다. 그들은, 근대 일본이 국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와중에서 료마로 대표되는 '우국지사'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한국병합도 일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그에 대해 이제까지와 같은 무조건적인 비판은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메이지 유신 긍정론=신자유주의사관의 흐름 위에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문제는 이해되어야 하며,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시바 료타로가 있다. 역사 그 자체보다는 소설화된 역사가 유행하는 현대사회에서, 메이지 전후의 일본인들을 미화한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들은 근대 일본 긍정론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이러한 그의 소설들을 무비판적으로 번역·수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인만의 영웅이어야 할 료마가 한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무신경성의 배후에는 지식인에 대한 일체의 정치사회학적 해석을 배제하려는 한국지식계층의 인식 또한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일양국의 우호는 상대방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상대국의 비판적 입장을 기꺼이 수용하는 한편, 자국 또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수립해야한다. 그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일본의 한국점령일 것이고,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심층에 놓여 있는 료마일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근대 일본의 이해와도 직결될 것이다.
--- 최관(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