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문제는 ‘mine’이라는 말이다. ‘내 것, 나의 것’이란 의미다. 이 말은 극에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딸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럽은 남성 중심 사회로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켰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딸은 자신의 소유물, 즉 자기 것이다. 아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했다. 결혼을 할 때도 딸은 “내 것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며 아버지가 골라주는 상대와 해야 한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시대가 바뀌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가 되자 여자를 천하게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중세의 보수적인 남녀관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들의 경우는 어떨까. “저 아들은 내 것이니까.”라고 말한 예는 한 번도 없다.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딸의 경우에는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시대감각을 민감하게 잡아내 글로 썼다.
하지만 결국 줄리엣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로미오와의 사랑을 지키려는 바람에 비극으로 끝난다. 현대가 아닌 르네상스시대였기 때문에 딸이 아버지를 거스르면 비극이 되는 것이다.--- pp.34~35「질주하는 청춘의 사랑」중에서
로미오는 결혼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연인의 마음이 자신의 것이 됐으니까 “오, 정말 축복 받은 밤이로구나!”라며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줄리엣은 연인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혼을 생각해 주길 바란다고 먼저 말한다.
이것을 무대에서 보면 로미오는 아래쪽에, 줄리엣은 2층 발코니에 있다. 따라서 로미오의 말은 밑에서 밤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때문에 몽상가나 로맨티스트와 같은 대사가 된다. 반면 줄리엣의 대사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언제 결혼해 줄 것인지를 묻는 행동적인 리얼리스트의 어조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해 여기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마음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남자는 사랑하는 것만으로 일단 충족된다. 결혼까지 가려면 한 단계 더 비약이 필요하다. 집을 장만하고 부인과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도 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질주하기 때문에 사랑에서 결혼까지 일직선이다.
이 밖에도 몇 개의 예가 더 있지만 발코니 신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줄리엣이 잇달아 말하며 완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다. 로미오는 그다지 말수가 많지 않다. 줄리엣이 한발 물러나면 그제야 자신의 기분을 말한다.
“연인을 만나러 갈 때는
하교하는 학생들처럼 설레지만,
연인과 헤어질 때는
침울한 낯으로 등교하는 것 같군.”--- pp.44~45「질주하는 청춘의 사랑」중에서
중세 봉건사회에서 ‘존재의 사슬’은 신이 만든 세계의 구조 속에서 히에라르키를 확립하고, 그에 따라 사회의 질서와 계급 관계를 합리화 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천사와 동물 사이에 있다. 이 단계들은 절대적이다.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식물은 동물이 될 수 없다. 신(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유일한 절대자이다. 기독교가 성립되고부터는 특히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호와 한 분이었다. 그 신의 사자로서 인간계에서 부리고 있는 천사들에는 9단계가 있다. 최고위의 치품천사 아래로 다양한 계급이 있다.
인간들 사이에도 주종관계, 부모자식관계, 상하관계 등이 있다. 그리고 동물도 말이나 개는 신분이 높지만 조개나 벌레는 신분이 낮다.
식물로 말하면 삼나무과의 높게 자라는 나무라든지 아름다운 꽃, 장미 등은 신분이 높고 이끼는 신분이 낮다. 그리고 미생물도 물이 흙보다 낫다든지, 금은 진주보다 대단하다든지 하는 상하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하나하나의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로 연결돼 있다. 즉, 아래에 있는 것이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을 거스르게 되면 ‘조반유리'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가 아니라, 신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테세우스가 “너에게 네 아비는 신과 같은 분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세계상이 있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이다.--- pp.58~59「질주하는 청춘의 사랑」중에서
헬레나는 “허미아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에 만족하세요.”라고 말하지만, 라이샌더는 “거짓이 아니오.”라며 스스로 구실을 대려는 듯 운을 달아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건 허미아가 아니라 헬레나 당신이오.
까마귀를 비둘기와 바꾸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남자의 욕망은 본래 이성의 지배를 받는 법이오.
그 이성이 말하기를 당신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는군요.
모든 것은 때가 되기까지 익지 쪾듯이
내 이성 역시 아직 어려 성숙하기까진 풋내가 났지요.
그러나 이제 분별을 갖게 되어 이성은 내 욕망의
지배자가 되고 나를 당신의 눈으로 인도해 줍니다.
당신의 눈이야말로 사랑의 진실을 가장 아름답게
기록한 책이오. 난 그걸 읽고 있는 거요.”
(제 2막 제 2장)
이 “남자의 욕망은 본래 이성의 지배를 받는 법이오.”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성이 허미아보다 헬레나가 아름답다고 말한다는 것도 거짓이다. 실은 이성 따위는 전혀 없는 맹목적인 상태에서 말하고 있는 남자의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무대 위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로, 지금까지는 어렸기 때문에 이성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말은 전혀 일리가 없다.--- pp.62~63「질주하는 청춘의 사랑」중에서
쉽게 말해, 베네딕은 베아트리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 그때부터 왠지 베아트리체가 신경 쓰이고 점점 좋아지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은 여자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던 자신과는 별개로 여자를 좋아하는 원래의 자신이 있다고 재인식하는 것이다. 원래의 자신에 눈을 뜬 두 사람은 다음번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서로에게 반해버린다. 결국 해피엔드를 이룬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베네딕의 다음 대사이다. 긴 독백의 형태로, 확실히 베아트리체는 좋은 여자다, 그녀라면 결혼해도 좋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하는 말이 다음에 인용한 대사다.
“나도 그 여자에게 홀딱 반할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봤자 나는 분명 농담이나 빈정거림만 당하게 될 거야.
이제까지 항상 결혼에 대해 지독히도 나쁜 말만 해왔던
남자인 주제에 뭐라고 하겠어.
그렇지만 좋아하는 음식도 변하게 마련 아닌가.
젊었을 때야 고기가 좋았던 남자라도,
나이가 들면 멀리하게 되지.
빈정거림이나 경구 따위, 머리에서 짜낸 그 글 뭉치들을
무서워해서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이
잘하는 짓인가? 그럴 리가 없어.
이 세상 인구를 줄이지는 말아야지.
내가 죽을 때까지 혼자 있으리라고 말했던 것은
결혼할 만큼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제 2막 제 3장)--- pp.87~88「꿈이 결실을 맺은 사랑」중에서
햄릿은 현재 내적 카오스에 빠져 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질서의 세계에 남아 있다. 결국 햄릿과 내적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햄릿이 수녀원에 가라고 해도 오필리아의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
햄릿이 “수녀원으로 가시오.”라고 한 것은 희망이 없는 절망의 소리이다. “너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하면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오필리아가 아름답고 순결한 채로 있기 위해서는 수녀원에 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에 희망이 없는 절망의 소리가 되고 만다.
수녀원의 장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햄릿은 내적 카오스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여자도 자신도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아직 인간을 믿고 있다. 따라서 생각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
햄릿은 아름다운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아름다운 여자는 반드시 배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필리아에게 “당신은 정숙한 여자요? 아니, 당신은 아름답소?”라고 추궁한다. 햄릿은 아름다움과 정숙함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필리아는 아름다움에는 정숙이 더욱 걸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차이에서 엇갈림이 시작되고 있다.
--- p.115「흔들리고 방황하는 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