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엾은 육체는 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매일매일 크든 작든 무엇인가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극심한 추위일 때도 있고, 너무나 따가운 햇살일 때도 있고, 어쩌면 맨발로 디디면 찌릿찌릿하게 아플 자갈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건 몸뿐이 아니다.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찬바람 부는 영혼의 겨울을 견디어나가기 위해 더 조심하고 단단히 지켜야 한다. 요 몇 년간, 나는 종종 아무 맥락 없이 선물이를 보고 ‘엄마 선물이 많이 사랑해,’라고 말했다. 길 가다가도 하고, 밥 먹다가도 하고, 책 읽다 말고 갑자기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방패가 되고 기둥이 되어서 작아지고 예민해진 내 마음뿐 아니라 우리 둘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바랐나 보다. 그 말을 하면 마음을 잃지 않고 다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영하 18도 추위를 견뎌나가기」중에서
며칠 지난 뒤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해봤다. 하나님이 돌봐주실 테니까 내가 죽어도 괜찮다는 그 생각이 아주 정직하게 내 믿음의 무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사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지만 아이가 있으니, 엄마한테 죄송하니,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변화시킬 수 있는 불행의 상태를 끝내지 않으면서, 살아야 해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 생각에 내가 느꼈던 건 안도감이었다. 내가 죽는다고 선물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그걸 인정한 순간, 스웨덴의 한 윤리연구가가 쓴 책 제목이 떠올랐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단지 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불행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냐, 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중에서
스웨덴 여름 모든 사람들의 골칫거리는 먼저 비, 그 다음으로 민달팽이다. 민달팽이라고 해도 한국 민달팽이와는 아주 다르고, 스웨덴어로는 머다르스니겔, 즉 살인 달팽이다… 엄청난 식욕으로 스웨덴 사람들이 봄여름 내내 열심히 가꾸어놓은 정원의 채소니 꽃을 처참하게 먹어치우고, 번식력은 어마어마한데 종족끼리 잡아먹어 이런 별명으로 불린다. 게다가 거무죽죽한 갈색의 번들거리는 몸집은 달팽이라기에는 거슬릴 정도로 큼직하다. 한마디로 징그럽다. 교환학생으로 왔던 어떤 친구가 한 말이 이 달팽이들이 얼마나 많고 또 어떤 모습인지 익히 짐작하게 해준다. ‘언니, 전 어머, 이 나라 길거리에는 웬 개똥이 이렇게 많아 했다니까요!’
---「살인달팽이의 위협」중에서
샬롯은 병가를 승인해주며 말했다.
‘당신이 한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어요. 지금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나,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 등 사고방식에는 문제가 없어요. 우울증과는 달라요. 당신은 지금 불행한 상황에 있고, 그래서 불행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약의 도움을 받아, 불행이 더 진행되어서 병적 우울증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해요.’
---「어떤 말은 도움이 된다」중에서
내 실망은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 때문이다. 나는 그 무거운 소파가 사라지면 13년간의 체증도 같이 사라질 줄 알았다. 물건들은 기억한다. 물건들에 시간이 담겨 있고 감정이 스며 있다. 둘이어서 행복할 수 있었던 날들과 행복 같은 건 생각지 않아야 견딜 수 있을 만큼 외로웠던 날들. 소파가 사라지면 내 기억도 좀 더 가벼워지기를 바랐다.
---「소파가 가져가지 못한 것들」중에서
‘나는 혼자라, 지금 혼자인 당신이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 알아요. 나는 늘 좋은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해나갈 수 있었어요. 필요하면 언제라도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지 물어봐요.’
---「옆집의 정원관리마니아」중에서
가끔 아이를 미팅에도 데려와야 할 때가 있다. 이때는 아무래도 아이는 아이다. 며칠 전에 세미나에 동료 한 명이 아이와 함께 왔다. 토론이 본격적으로 오가기 시작하자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영화 보는 데 방해돼요!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아이 아빠는 토론의 주제인 논문계획서에 대한 자기 의견만 말하고 서둘러 애를 데리고 나갔다.
---「피카 한잔 하세요] 중
지난 경험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안다고 느끼는 것이 때로 얼마나 허망한지,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는지 잘 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상처 줄 수 없을 정도로만 그를 좋아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관계는 기쁨을 주는 만큼 상처도 줄 수 있다. 바보 같은 짓인지 모르겠지만, 보장된 평온과 불확실한 기쁨 사이에서 난 조심스레 내 마음이 가는대로 놓아두고 있다.
---「조심스레, 마음이 가는 대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