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이어리에는 각종 공모전 일정들이 빽빽이 기록돼 있었다. X방송재단 시나리오 공모전, D출판사 어버이날 기념 독서감상문 대회, K시 동화구연대회, 드라마 제작 전문프로덕션 R사 액션 대역배우 연기 콘테스트, 경남 J시 수목원 관람 수기, A출판사 자기계발서 독후감 공모전, Y케이블방송국 드라마 주인공 성대모사 콘테스트, 수자원공사 물 절약 캠페인 표어 공모, 전남 Z시 효행 권장 글짓기 콘테스트, 월간 W문예지 스토리 공모전, E출판사 주최 감동의 편지 쓰기 공모전…….
그러니까 나는 콘테스트 사냥꾼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좀스럽기 짝이 없는 일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생계가 달린 일이었다. 또한 생계가 달린 일이라면 좀스럽든 성스럽든 다 마찬가지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누구나 살면서 지불해야 할 좀스러움은 있는 법, 좀스러움 총량의 법칙이랄까. ---「콘테스트 사냥꾼」중에서
황은 내게 이른바 갑이었다. 콘테스트 응모만으로는 먹고살기가 빠듯했고, 그래서 이따금 그가 던져주는 교정 아르바이트는 거절하기 힘든 당근이었다.
K출판사의 단행본 편집팀장을 맡고 있는 황은 책을 다섯 권이나 낸 소설가였다. 대학 시절, 같은 문학동아리 회원이었던 그와 나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극명하게 갈렸다.
5년 전, 그와 나의 작품이 국내 최고 상금이 걸린 장편소설상 최종심에 나란히 올랐었다. 수상작은 황의 작품으로 결정되었다. 황은 이후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고, 나는 내리막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하긴 내리막길이라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뭐, 오르막이 있어야 내리막도 있는 게 아닌가. ---「주인과 노예」중에서
“내가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될 것 같다. 물론 나 말고도 대여섯 명쯤 더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심사위원이 된다면 일단 한 표는 먹고 들어가는 거지.”
“한 표?”
“그런 데서 한 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게다가 우리 출판사가 주최하는 거니까 자연 내 입김을 무시하진 못할 테고.”
나는 숟갈질을 멈추었다. 황의 눈동자가 확 빨려 들어왔다. 지금 황은 흰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밥맛은 달아나고 없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거래를 하자는 거냐?”
“눈치는 있군.”
“조건은?”
“1억.” ---「주인과 노예」중에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야기와 이미지는 이런 쓰레기가 아니었다. 키보드라는 그물로 건져 올린 글들은 낙서만도 못한 것이었다. 나는 다시 노트북의 빈 여백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번엔 조금 더 차분하게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의욕만 충만할 뿐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재도, 이야기도, 인물도 무엇 하나 걸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손을 떠나 있던 소설이 갑자기 써질 리 만무했다.
이제 소설가로서의 삶은 끝난 것인가.
먹먹한 심정으로 지나온 시간을 반추해보았다. 잡문 콘테스트에 뛰어들었던 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얻은 것은 잡문이고, 잃은 것은 문학이었다.
1등 수상자 명단에는 익숙한 세 글자만 보였다. 소정훈. 바로 아래 2등 수상자 명단에 내 이름만 없었어도 그토록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등 상품은 별로 쓸모도 없는 관광상품권이었다.
이자는 아무래도 내 천적인가 보군.
---「힘겨루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