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누군가의 삶에 조언을 해줄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잘난 스펙도 없었고, 대기업이나 내로라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시에 붙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소위 잘나가는 멘토 분들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비록, 제 소신에 따른 행동이긴 했지만 큰돈을 받고 사이트를 팔 기회를 던져버렸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도 거절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저를 보며 왜 그리 답답하게 사냐고, 왜 그리 바보처럼 구냐고 충고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자처해 고생만 죽도록 한다면서요.
하지만 누구나 같은 성공을 꿈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어리숙하고 어설펐지만 뜨거웠고 설렜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제가 바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이유라면 저는 앞으로도 바보처럼 살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학생들에게 멘토 한 명씩을 만들어주겠다는 꿈으로 세상을 바꾸는 바보 말입니다.---프롤로그 중에서
남보다 한발 앞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명수도, 학교 이름을 팔아 적지 않은 과외비로 여행경비와 대학원비를 모으는 태헌이도, 모이기만 하면 비슷한 고민과 표정으로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를 위로하기 바빴다. 그렇게라도 열심히 무언가에 집중하는 친구들이 부러운 한편, 사회가 요구하는 시스템에 영원히 안주하려는, 또 그렇게 움직이는 사회가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뭔지 누군가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의 대학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이 없어서였다. 돌아보니 내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였다. 현실은 사회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준 무한질주 바코드를 따르거나 무기력하게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이들로 나뉘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과감히 자유를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공평하게 주어진 청춘이 누구에게는 날개가 되고 누구에게는 족쇄가 되었다. 당시 몇몇에겐 있고 내겐 없던 꿈! 나를 청춘이라 부르기조차 부끄러웠다.---청춘 실종신고 중에서
복학을 하고 말하기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간질간질한 욕망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늘 머릿속은 큐브를 맞추듯 무의식적으로 이런저런 수를 놓으며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학기 중인데다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바쁜 시기였다. 그러던 중 떠오른 단어가 바로 ‘공신’이었다.
자다 깨서 얼핏 떠오른 이 이름이 훗날 대한민국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공신’의 시초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중에야 드라마나 방송 등을 통해 ‘공부의 신’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처음 뜻은 ‘공부를 신나게’였다. 나는 지금도 이를 초심에 더 가깝다고 강조한다.
왜 하필 ‘공부를 신나게’였을까? 학창 시절 나는 공부를 신나게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폭력과 열등감, 피부병 때문에 하루하루 지옥을 거니는 기분으로 수험생활을 버텼다. 복학한 후에야 비로소 공부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공부를 즐기면서부터 학점은 순식간에 4.0으로 상승했다. ‘그래 저거다!’---공신? 공부를 신나게! 중에서
공신닷컴의 메인은 역시 내 동영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내 강의 대신 조금씩 다른 공신들 위주로 강의를 올렸다. 내 강의가 인기 있는 건 뿌듯했지만 공신이 나라는 개인의 사이트가 아니라, 철저히 멘토와 멘티의 상호 커뮤니티로 운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내가 직접 강의를 찍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육 회사였다면 내가 스타강사가 되는 게 가장 빨랐겠지만, 공신이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다.
이런 노력과 달리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주겠다던 대의를 기억하는 공신들은 많지 않았다. 이름만 올려놓고 멘토링에 참여하지 않거나, 한번 해보고 힘들다며 사라지는 멤버들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등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공신도 많았다. 왜 고생스럽게 이 일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전공과도 관련 없고 밑빠진 독처럼 돈만 들어가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다음날 사이트를 닫을 수도, 사교육 업체에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국보급’ 콘텐츠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강 사장, 나중에 나 갈 곳 없으면 취직 시켜줘.”
친구들은 MBC 〈공부의 제왕〉 출연 이후로 나를 줄곧 갑부처럼 여겼다. 사회적 기업을 한다고 하면 돈은 이미 많이 벌었으니 폼 나는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 강 대표, 멋지다. 나도 때려치고 회사나 차릴까?”
실상은 많이 달랐다. 사실 직원보다 더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장들도 적지 않다. 경제적, 물리적으로 힘든 것보다 주변을 의식하는 내가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날 힘들게 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대기업에 다니거나 유학 중이었다. 함께 만나면 뭐라 표현은 못해도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나 월급 100만 원이야! 회사에서 자고 돈이 없어서 세 끼 내내 김밥으로 때운다고!’
차라리 속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었다. 내게는 마음을 터놓고 상의할 친구도, 동료도 없었다. 방송 출연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시절 나는 지독히 외로웠다.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지독한 소외감을 불러왔다.--- 가보지 않은 길, 힘들고 어려운 길 중에서
“선생님,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사람을 뽑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그냥 시간 날 때 하는 형식적인 봉사가 아니라, 정말 강남 못지않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습니다.”
동아리일 때도 벤처기업일 때도 가장 큰 고민은 사람관리였다. 그날 안철수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은, 훗날 공신이 탄탄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회사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흔히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에 버스에 탈 사람을 정하라는 말이 있죠. 비전과 핵심가치를 정하는 일은 구성원 모두의 몫입니다.”
“교수님께서 안철수 연구소에 계실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구성원 모두가 조직의 핵심가치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연스럽게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핵심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죠.”
“조직 내부에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도 좋지 않고 당사자에게도 고문일 것입니다. 나가도록 하는 것이 맞지요.”
교수님의 단호한 답변이 꽤나 놀라웠다. 조직의 비전과 맞지 않는 인물은 내보낸다. 내가 지금껏 상상하고 봐왔던 부드럽기만 한 교수님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결단력 있는 모습이었다. --- 지금 멘토가 필요한 건 바로 공신이야! 중에서
사회적 기업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일반 벤처기업의 생존확률이 5%도 안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가치까지 고민하며 기업을 운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역량이 엄청나게 분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라빈드 병원과 같이 멘토링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만들어내야, 효율성과 전문성을 갖춘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아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돈을 버는 것이 죄는 아니다. 다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만 만나오던 나는 어떻게 돈을 받을지를 너무 오랜 시간 망설였고, 드디어 어느 정도 가닥을 잡게 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실전이었다. 어마어마한 기존 사교육 업체들과 승부를 벌여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다행히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열렬한 반응은 우리의 자신감을 채워주기 충분했다.--- 소셜벤처 공신, 마침내 수익모델을 마련하다 중에서
나는 앞으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공신의 비전과 사명을 수십 번씩 되풀이해 써보았다. 뚜렷한 답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치가 아닌 어떤 분야라도 나의 경험과 지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다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갈 길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러한 나를 바보 같다고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성태 넌 정말 희한한 녀석이다. 예전에는 10억도 마다하더니, 이번엔 국회의원 자리를 걷어차? 너 그러다 나중에 천벌 받는다.”
사람은 살면서 세 번의 기회를 맞이한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친구들 말처럼 그러한 기회를 오는 족족 걷어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공신을 통해 수도 없이 많은 기회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신을 통해 아이들에게 멘토를 찾아주고 꿈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는 기회. 이것만큼 값진 기회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조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