엮은이 인터뷰 ― 윤구병이 들려주는 한창기, 그리고 그의 생각들
―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을 엮은 세 분 선생님 중 윤구병 선생님을 2007년 10월 5일 ‘문턱 없는 밥집’에서 뵈었다. 공기가 된 듯, 바람에 몸을 맡기신 윤구병 선생님은 좀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최세정 (인문)편집장과 함께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기억, 한창기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 책을 엮은 과정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여쭈어 보았다. (편집자주)
▶ 안녕하세요. 윤구병 선생님! 한창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주기를 맞는 해에 ‘한창기의 생각’을 담은 세 권의 책을 펴내셨는데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우리 문화와 말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애정을 느끼고 실제로 그것을 보존하고 확산하고자 애쓴 분을 한창기 선생님 외에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을 마음속에 간직한 것뿐 아니라 실천하신 분을 따로 보지 못했습니다.
한창기 선생님은 원어민처럼 사용할 만큼 영어에 능통한 분입니다. 그렇지만 외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고 우리 문화, 우리말에 대해 깊이 천착을 하셨는데, 이는 아마 책을 읽으면 다 드러납니다. 한창기 선생님은 갇힌 곳이 아닌 열린 곳에서 열린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말의 질서,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으신 분이므로 그 애정은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한 선생님의 글이 읽혔으면 했는데, 이제야 책으로 엮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 한창기 선생님의 글은 인문학적 향기가 흠뻑 배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언어철학의 사유들을 가장 먼저 시작하신 분이라고 봅니다. 역사, 철학,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 글인 듯한데요. 한창기 선생님의 글에 숨어 있는 근본적인, 베이스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요?
한창기 선생님의 고향은 벌교인데, 그곳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 두 분에게서 삶의 지혜를 보고 배웠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깊은 깨우침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시골 어르신들의 이야기, 농경 사회를 감싸고 있는 문화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지요. 나중에 한창기 선생님은 미국문화원에 근무했던 곽소진 선생님과 예용해 선생님 들과 교류하면서 우리 문화의 바른 길을 안내받았다고 봅니다. 우리 문화의 시각을 잡아 주신 분은 예용해 선생님이고, 실제로 판소리 감상회를 매주 금요일 100회 이어오게 한 것은 정병욱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한창기 선생님의 개인적인 소양뿐 아니라 이런 분들과의 교류가 선생님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 것이라 봅니다.
▶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글이 깊고 꽤 재밌습니다. 이 글을 쓴 지가 30년 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데요. 인문학의 향기가 듬뿍 배어 있는 이 텍스트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겁니까?
민중의 언어, 특히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아 오던 토박이말을 사랑하고, 그 말과 글 속에 담긴 문화를 진정으로 향유하던 사람입니다. 언어의 다양한 쓰임새를 자유자재로 적확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문화의 향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부지불식간에 침투해 오는 서양 문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과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고 오염되어 가는지를 누구보다도 세밀하게 집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은 책상 위, 책 속에서, 그리고 박물관에 진열된 작품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알아 나간 사람들과는 달라요. 삶 속에서 삶이 곧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였던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 사람들의 앎과 지혜를 소유한 분이 한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전설이 된 편집자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 세 분이 이 글을 엮으셨는데요. 세 분을 각각 소개해 주세요.
저 윤구병은 《배움나무》 편집장이었다가 《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으로 일했죠. 충북 대학교에서 철학과 선생을 할 때도, 나중에 변산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농사를 지을 때도, 또 지금도 한창기는 저에게 ‘선생’입니다.
저를 이어 《뿌리깊은나무》의 편집장으로 일한 분이 김형윤 선생입니다. 《한국의 발견》을 만들 때도 책임 편집자였는데, 한창기의 ‘꼼꼼한 눈’을 높이 치지만 지긋지긋할 때도 많아 좀 멀리 보고 크게 볼 줄도 아시라고 망원경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설호정 선생인데요, 《뿌리깊은나무》 창간 준비를 하면서 저와 김형윤이 설호정 씨 일터로 같이 찾아가서 ‘모셔’ 왔어요. 《뿌리깊은나무》 편집차장을 거쳐 《샘이깊은물》에서 주간으로 일했습니다. 병상의 한창기가 마지막까지 의지한 몇 사람 중의 한 분입니다.
▶ 한창기 선생님의 책을 기획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살아생전에도 책으로 엮자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본인이 극구 말리시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엔 아마 다들 사는 데 바빠서 마음은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었다고 봅니다. 그러다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한창기 선생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신 것이지요?
철학과 대학원을 나와 강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하숙비와 교통비도 댈 수 없었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친구의 친구가 브리태니커사를 소개해주더군요. 자기소개서를 꽤 길게 써오라는 요구를 해왔었죠. 면접을 보는데 별로 후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보아하니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이런 깡패 집단엔 왜 오셨수?” 하기에 “밥 빌어먹으려고 왔습니다.” 했지요. 서로의 문답이 거슬리지 않아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지요. 당신같이 공부 많이 한 거룩한 사람이 외국 책이나 팔아먹는 사기꾼 집단에 왜 들어왔는가 하는 물음이었던 듯싶습니다. 그때는 군사독재 시기로,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졸부들에게 팔아먹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