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보낼 유치원을 정하고 난 뒤 남편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제 드디어 우리도 여유로운 도쿄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진짜 다행이다.’라고. 그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유치원이 어떤 유치원일지, 그리고 그 유치원 하나가 우리 모두의 도쿄 생활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게 될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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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유치원은 사실 엄마들에게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 무척이나 힘든 유치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유치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건 하나같이 다 아이가 이 유치원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곳은 국적, 인종, 언어를 불문하고 어떤 아이든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성의 유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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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아이들을 신나게 뛰어놀게 했을 뿐이었는데 아이들은 그 안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일본어를 익히고 게다가 곤충학자라는 꿈까지 얻게 되었으니 예상치 못한 놀이의 힘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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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온 나로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도대체 우리에게 여성이 전업주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전업주부로서 열심히 산다는 것은 과연 그렇게 불쌍하고 처량한 일일까? 전업주부는 직업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우리에게 전업주부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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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은 언제부터 이렇게 유치원과 학교마다 수영장을 만들고 수영 수업을 시작하게 된 걸까? 마치 우리나라의 세월호 참사처럼 일본에서도 1955년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많은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시운마루호 침몰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고 이후로 일본의 수영 교육이 지금과 같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의 수영 교육은 스포츠로서의 수영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수영으로서의 목적이 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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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얘기, 남편 얘기에서 벗어나 각자가 가진 재능들로 함께 도와가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는 일은 내게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작지만 소중한 성취감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들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추억으로 다시 태어날 때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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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35도를 넘어가던 도쿄의 지독한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바람이 쌩쌩 불던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비가 올 때면 장화에 우비, 우산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는 그렇게 매일매일 왕복 3km를 걸어 유치원을 다녔다. 한국에서라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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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지 않아도 고급스러운 료칸에서 화려한 휴식을 즐기지 않아도 그 평범한 일상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도쿄 생활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평범한 일상에 그저 아빠 한 사람만 조금 더 깊숙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이 달라질 수 있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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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이와의 시간을 담은 멋진 사진인가 아니면 아이와 함께 한 시간 그 자체인가. 와세다 유치원에서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웃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몸을 부딪치는 그 순간순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모는 아이의 유치원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그 순간을 그저 사진으로만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유치원 생활 자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었다.
--- p.94
“어머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은우가 그런 행동을 보인 데에는 분명 은우만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이의 이야기를 너무나 들어보고 싶은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서 그게 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할 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뿐입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절대 무조건 엄하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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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국 유치원으로 다시 갈 거야! 여기 싫어! 한국 유치원에서는 아무도 내 거를 이렇게 뺏어가지 않는단 말이야!” 아이는 정말 서럽게 울어댔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도 아이와 함께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아이는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실 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만큼 나도 많이 지쳐 있었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일본 엄마들 사이에 덩그러니 끼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멀뚱 서 있어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나에겐들 결코 쉬웠을 리 없었다.
--- p.109
나는 좋은 추억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일본에서 보냈던 즐거웠던 시간, 와세다 유치원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했던 그 시간, 가족이 온전한 가족으로서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다시 일본어를 접하게 될 때, 언젠가 또다시 일본어가 필요하게 될 때 그 무엇보다 큰 원동력이 되어 아이들을 다시 일본어의 세계로 이끌어 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일이든 배움이란 결국 그런 호감과 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 p.119
나는 순간 정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국 남자와 스위스 남자가 도쿄의 한 이자카야에서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낭만을 잃어버린 한국인 와이프와 말레이시아인 와이프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일본어로 말이다! 세상 무슨 이런 재미난 풍경이 다 있을까.
--- p.130
우리 가족이 와세다 유치원에서의 1년을 통해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것처럼 유치원의 다른 친구들 역시 우리로 인해 또 다른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면 그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시간들, 그 시간들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뼘씩 성장할 수 있었다.
--- p.136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멋지고 예쁜 모습을 마음껏 뽐내는 작은 공주님과 왕자님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무대를 모두 기획하고 만들고 완성해 간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 p.151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 아이가 훌쩍 커버리고 난 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다면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분명 그 엄마들과의 추억도 함께 기억해 낼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을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고 함께 추억을 나누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끈끈한 동지애를 공유한 사이였다.
--- p.165
그날 저녁 오랜만에 다시 만난 와세다 유치원 엄마들 사이에 끼어 그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으며 일본어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게 꿈은 아닌가 싶을 만큼 나 자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와세다 유치원의 달님반에 있었던 한 ‘외국인’ 엄마가 아니라 지금은 외국에 살고 있는, 다른 엄마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평범한 달님반 엄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 p.172
나는 그 동영상 속에서 달님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모두 다 눈에 담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늘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던 엉뚱한 쇼타로, 얼굴 가득 장난기가 넘쳐흐르던 개구쟁이 노조무, 뚱한 표정이 언제나 너무 귀여웠던 타이, 새침데기 공주님 같던 히나타, 맏언니처럼 늘 든든하던 미리야,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말괄량이 소녀 마노. 그야말로 한 명 한 명 모두 다 개성이 넘쳐흘렀다. 아,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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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학부모 모임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도 그 엄마들은 누구보다 밝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그 일들을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엄마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아이가 내 곁을 떠나 자신만의 세상으로 훨훨 날아갈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말이다.
--- p.191
사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늘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가끔은 내 인생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위한 것인지 하는 마음에 한숨 쉬게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가끔 만나게 되는 이런 잊지 못할 특별한 순간들, 그리고 그로 인해 눈뜰 수 있었던 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세상들 덕에 어쩌면 나의 인생이 오히려 이전보다 조금 더 풍요로워지고 또 조금 더 깊이 있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