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지켜야 할 수취인은 공무원(권력자·권력기관)이고, 헌법에 따라 법령을 지켜야 할 수취인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법률입니다. 권력기관이나 공무원이 지키는 것이 헌법인데, 거꾸로 말하자면 헌법을 권력자에게 지키도록 만들 책무가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확히 헌법에 쓰여 있는 내용이지만, 자세한 것은 자민당 개헌 초안과 비교하면서 다시 읽어가기로 하죠. 여기서는 입헌주의라는 것이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을 공무원에게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중심 포인트를 일단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입헌주의의 본뜻을 파악한 지반 위에서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입헌주의의 위기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쉴즈와 틴스 소울의 여러 학생들도 솔직히 그러한 위기감을 표명하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되 애초에 입헌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동일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혹은 그 두 개의 주의주장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없겠는지요? 저는 도쿄의 연구자들이 긴급히 결성한 〈입헌 데모크라시의 모임〉이라는 조직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는데, 저 자신은 그런 조직 명칭에 위화감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한에서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가 언제나 반드시 서로에게 융합되는 동일한 방향성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힘의 형태로서 입헌주의를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p.66~68
일반적으로 일본국 헌법은 기본적 인권, 평화주의, 의회주의, 민주주의로 규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일본국 헌법을 생각하면, ① 상징천황제, ② 헌법 9조와 평화주의, ③ 미국의 기지화라는 세 가지가 합체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들이 어떤 연결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가 항상 문제였다고 할 수 있겠죠.
맥아더가 헌법에 9조를 기입했던 배경에는 천황의 존재가 100만의 군대에 상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국 헌법은 전쟁 반대 규정을 통해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일에 큰 역점을 두고 있었죠. 그러나 동시에, 군대를 배제할 경우 일본인이 크게 반발하리라는 생각 아래 도쿄 재판에서는 천황을 면책했던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런 면책을 위하여 헌법 9조를 설정했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죠. 예컨대 당시의 의회에서는 헌법 9조를 두고 ‘천황제를 수호하기 위한 피뢰침’이라는 표현까지도 나왔었습니다. 결코 헌법 9조만이 돌출해 있었던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징천황제를 수호하고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졌던 겁니다.
--- p.167~168
일본국 헌법에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고,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 등에도 그 개념이 거론되고 있지만, 일본국 헌법의 ‘전문’이 세계에서 최초로 평화적 생존권 개념을 규정했습니다. ‘9조’는 헌법의 ‘제2장’에 들어 있는데, 제2장은 9조 하나로만 되어 있습니다. 보통 몇 가지 조문들이 모여 하나의 장을 이루지만, 일본국 헌법 제2장은 9조 하나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죠.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실은 초안을 잡는 과정에서 ‘전쟁 포기’ 대목의 일부분이 ‘전문’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2장’은 조문이 하나밖에 없으며 다름 아닌 ‘전문’과 긴밀한 일체성을 띠게 되는 것이죠. ‘전문’에서 9조의 취지가 명확해지고 있으며, ‘전문’이 9조 해석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전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제와 노예적 복종, 압박과 편협을 땅 위에서 영원히 제거하고자 힘쓰고 있는 국제사회 속에서 명예 있는 지위를 점하고자 한다.” 즉, 일본국 헌법에서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전제와 노예적 복종 혹은 누군가로부터의 압박이나 차별 같은 것들이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제거되는 것이 ‘평화’라고 규정되어 있죠. 이것이 중대한 점입니다.
--- p.229~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