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앞에 지금 풍경 하나가 실루엣처럼 천천히 떠오른다. 버려진 옛 포구의 주택가 한쪽에 검버섯같이 우중충하니 돋아난 두 채의 건물. 당신 소설의 무대가 될 바로 그 집, 백년여관. 포구 동쪽 변두리의 막다른 골목 어귀에 그 삼류 여관은 서 있다 벽돌로 쌓아올린 2층 건물은 외벽 여기저기 벗겨져 나간 칠 자국과 거무죽죽 흘러내린 빗물 흔적 때문에 가뜩이나 추레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백년여관. 티브이 & 욕실 완비. 현관 전면 벽에 비뚜름히 내걸린 흰색 바탕의 작은 아크릴 간판이 없다면, 외지인들은 자칫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겠다.
살아 있는 한,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는 한, 그건 과거가 아니라 그들에게 엄연한 현재야.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컴퓨터 자판의 ?삭제?키를 눌러 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지워버리라고? 천만에. 너희들은 정작 그 사람들을 ?삭제?하고 싶은 거겠지. 어쨌거나 너와 동시대인임에 분명한 그들의 삶, 아니 존재 자체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거겠지. 왜냐면 지겨운 그들의 삶은 실상 바로 너희 어미와 아비, 할아비와 할미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그러므로 너하고도 결코 무관할 수 없을 테니까. 그 고약한 인분 덩이를 눈앞에 빤히 놓아두고서야 아무 일도 없다는 양 훌쩍 뛰어넘어, 저 현란한 너희들의 미래 속으로 홀가분하게 내달려가기란 아무래도 거북스럽고 기분 찜찜할 테니까. 안그래?
그건 또 왜였을까. 축 늘어진 사내의 야위고 흰 손과 벗겨진 한쪽 발에서 당신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남자의 생의 궤적에 숨겨진 처절한 고독과 누추함이 지금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었다. 그러자 당신은 목구멍이 뻑뻑하게 차오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득 그 사내를 향해, 애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어떤 강렬한 친밀감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당신 역시 그 무서운 고독과 쓸쓸함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복수야. 아버지 눈을 들여다보거라……. 자, 이제부터 아버지가 하는 말,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이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우리 식구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복수야. 너는 이 아비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유일한 미래란다. 울지 마라. 아버지는 영영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살아 있다면 이 아버지도 함께 살아 있는 것이야. 네 영혼 속에서, 너의 가슴속에서 말이다……. 자, 어서 가거라. 당장!?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