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보성읍 밖의 일명 소릿재라는 곳에 위치한 한적한 길목 주막 안에서, 주막집 여인은 초저녁부터 줄창 소리를 뽑아대고, 사내는 그 여인의 소리에 맞추어 끊임없이 어떤 예감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북장단을 잡고 있다.
--- p.47
언제고 이 주막에 앉아서 소리를 했지요. 연고를 알고 보니 노인은 그때 이 주막에 앉아 소리를 하면서 선학동 비상학을 즐기셨던 거드구만요. 표구에 물이 차 오르고 선학동 뒷산 관음봉이 물을 타고 한마리 비상학으로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면 노인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그 비상학을 벗 삼아 혼자 소리를 시작하곤 했어요, 해질녘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부녀가 그 비상학과 더불어 소리를 시작하면 선학이 소리를 불러낸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한 것인지 분간을 짓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지요.
--- p.72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 주려해서 심어 줄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그 역시 한의 밑자리에서 아픔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아픔이나 원망이 쌓여가고 풀리는 감정태로서가 아니라, 그 아픔을 함께 껴안고 초극해 넘어가는 창조적 생명력의 미학'으로 한의 본질은 파악한다.
--- p.32, 208
사내는 이제 얼굴빛이 참혹할 만큼 힘이 빠져 있었다.
'그래 여자는 그럼 자기의 눈을 멀게 한 비정스런 아비를 어떻게 말하던가?'
몇 잔째 거푸 술잔을 비우고 난 사내가 이윽고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물었다.
'그 여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답니다.'
사내 앞에선 이제 더 이상 숨길 일이 없다는 듯 여인의 말투가 한결 고분고분해지고 있었다.
'여자가 말한 일이 없더라도 평소에 아비를 대하는 거동 같은 것을 보아 그 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맘 속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말이네.'
빈틈없이 파고드는 사내의 추궁에 여자는 거의 억지 짐작을 꾸며대고 있는 깃이었다.
'행동거지로만 본다면야 말도 없고 원망도 없었으니 용서를 한 것 같아 보였지요. 더구나 소리를 좀 안다 하는 사람들까지도 그걸 외려 당연하고 장한 일처럼 여기고들 있었으니께요.'
'그 목청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멀게 했을 거라는 얘기 말인가?'
'목청도 목청이지만,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못할 한을 심어 줘야 한다던가요?'
'그래서 그 한을 심어 주려고 아비가 자식 눈을 빼앗았단 말인가?'
---p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