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헤톤 출신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기원전 5세기경)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입니다. 그는 주로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돌린 소피스트로 기억되는데요. 자연, 사회, 인간을 통찰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를 포괄적으로 제시해주려고 노력한 만큼 연구 분야도 다양합니다.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존재론,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올바른 지식을 얻는지 연구하는 인식론, 사고의 올바른 형식을 연구하는 논리학, 의식과 사고가 발생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심리학, 예술의 본질을 연구하는 미학, 인간 행위의 규범을 연구하는 윤리학 등이 그가 관심을 기울인 주요 분야예요. 또한 개인 간의 자발적인 행동 규범인 도덕과 함께 국가가 개인에게 강제로 요구하는 법과 정의의 문제도 고찰 대상으로 삼았고요. 소피스트들은 존재론보다 인간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돌리면서 실천적인 철학을 제시했는데, 트라시마코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회 철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_『트라시마코스』 중에서
플라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변화의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해요.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와 대비 되어 현상계의 근원이 되는 세계인 ‘이데아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현상계는 모두 이데아계를 모방한 것이라 보는 거예요. 아름다운 사물은 ‘미(美)’라는 영원한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개별 인간도 ‘인간’이라는 이데아를 모방하여 탄생한 것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과 함께 사는 반려견이 있어요. 녀석의 이름은 토마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우리가 밥을 주고, 같이 산책하고, 목욕을 시켜주며 애지중지 키우는 토마는 ‘진짜’가 아니라고 봅니다. 토마는 ‘개’의 이데아를 모방한 현상일 뿐이라는 거예요. 이데아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데 우리와 함께 사는 토마는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잖아요? 플라톤이 볼 때 그처럼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들은 이데아가 아닌 거예요.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①보편적 개념, ②생성과 소멸을 모르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 ③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 ④영원히 스스로와 동일한 것, ⑤만물의 원인, ⑥만물의 원형, ⑦모든 것이 추구하는 목표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_『플라톤』 중에서
과학은 사물과 사건의 원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탐구하며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과 관계를 지니는 법칙을 찾아내는데요. 여기서 과학은 항상 물질적인 원인과 결과, 다시 말하면 물질세계 안의 인과적 연관성을 탐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인과 관계는 가톨릭 신학에서처럼 세계 전체에 적용될 수 없어요.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측정될 수 없는 정신적인 신이 세계의 원인으로 미리 가정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에요. 지금 우리 집에 사는 길냥이 까망에게는 엄마 아빠가 있어요. 그런데 까망이의 엄마 아빠에게는 또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었겠지요? 그 부모의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가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이렇게 앞선 원인을 끊임없이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까망이네 가문의 모든 고양이를 있게 한 최초의 원인을 가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입니다. 아퀴나스는 그것을 신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의 추론은 증명이 아니라 상상이자 독단입니다. 물질적인 요인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다가 어느 순간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관계로 비약하니까요. 또 하나, 세계의 존재 원인으로 신을 가정한다는 것은 세계가 유한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요. 가톨릭 신학은 그것을 증명하지 않고 단순히 주장하는 데 머물고 있습니다. 세계의 원인이 되는 신의 존재는 사유 가능하긴 해도 현실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_『아퀴나스』 중에서
볼테르가 활동하던 시절 가톨릭이 우세하던 프랑스의 도시 툴루즈에서는 신부들이 모든 권리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이 도시에 칼라(J. Calas)라는 선량한 신교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요. 1761년 10월 어느 날 밤 그의 큰아들이 아버지의 가게에서 목매어 자살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자살은 죄악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자살자를 벌거벗긴 채 수레에 매어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교수대에 매다는 법률이 있었어요.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아들이 자연사한 것으로 증언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결과 아들이 가톨릭 쪽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으려고 아버지와 다른 아들이 큰아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칼라와 그 아들은 체포되었는데요. 살인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당시는 툴루즈 사람들이 신교도를 증오하고 있었던 때라 부자(夫子)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재산은 몰수되었고, 아들은 추방당했고, 칼라 자신은 고문을 당한 후 바퀴에 매달려 으깨져 죽는 가장 처참한 형벌을 받았어요. 살아남은 그의 아들은 박해를 받던 중 간신히 페르니로 도망쳐 볼테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비인간적인 박해의 이야기를 들은 볼테르는 경악과 함께 분노를 금치 못했어요. 그는 이 사건의 정당한 해명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합니다. 책상에서 연구만 하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고자 마음먹은 거죠. 그러고는 투쟁을 위하여 이론적인 철학 을 과감히 내던집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명쾌한 전말서를 인쇄하여 친구들에게 돌렸고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요청했어요. 칼라의 부인을 파리로 보내어 청원하게 했고요. 교회는 볼테르의 마음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들에게 쓰는 모든 편지를 “파렴치를 분쇄하라!”는 말로 끝맺는 대담한 투쟁을 전개합니다._『볼테르』 중에서
칸트는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감성에도 선천적인 형식이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그것이 곧 ‘공간과 시간(space and time)’입니다. 이때 공간은 외감(外感) 형식이고, 시간은 내감 (內感) 형식이에요. 그런데 감성에 의하여 구성된 직관도 아직은 인식의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직관이란 감각, 지각 및 표상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적 인식의 과정 또는 그 형태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인데요. 여기서 우리는 ‘과정’이라는 표현과 ‘포괄적’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즉, 완전한 개별 인식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는 뜻이지요. 너무 어렵나요? 좀 더 쉽게 설명 할게요. 직관의 단계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바라보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어렴풋한 직관들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명확한 개념이 이루어져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짙은 안개 속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저 멀리 뭔가 보여요.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니 뭔가 기다란 게 나무인 것 같기도 하고 가로등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키가 큰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두고 자세히 봅니다. 이따금 노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기둥 같은 것을 무엇이라 생각할 것 같나요? 예, 십중팔구 가로등이라고 판단하겠지요. “어렴풋한 직관들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명확한 개념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_『칸트』 중에서
포이어바흐는 삶이 그 본질상 전적으로 신성하다고 보았습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을 놓고 인간 사이의 사랑을 강조한 포이어바흐의 철학에는 휴머니즘이 엿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어떤 신도 더 이상 갖지 않고 어떤 종교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도덕적이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나 봅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해 인간이 창조한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며 자신을 비하시킨 거예요. 그것이 바로 종교적 소외인데요. 포이어바흐는 참된 철학은 이러한 소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인간에게는 인간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신학은 바로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고요. 포이어바흐는 신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인간의 주체성을 확신했던 철학자입니다._『포이어바흐』 중에서
1883년에 플레하노프는 최초로 『사회주의와 정치 투쟁』이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혁명가들에게 옛 이념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위해 단합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성립시킬 수 있는 핵심 세력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사실을 강조해요. 플레하노프는 1887년에 폐결핵을 앓게 되어 고생하게 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이후 1889년 그는 아나키즘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런던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엥겔스와 만나요. 1891년 플레하노프는 엥겔스의 저술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1891년에 「헤겔 60주기에 부쳐」라는 기사를 씁니다. 1894년에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라는 팸플릿을 베를린에서 독일어로 작성했고요. 그 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유럽의 사회 운동에 동참했고 이 시기 역사 문제에 관한 저작을 많이 내놓습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동인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민중이며 민중의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철학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이념이 그의 역사관을 주도했는데요. 1900년에는 예술 철학에 관한 주요 저술인 『주소 없는 편지』를 페테르부르크에서 발간하지요._『플레하노프』 중에서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 오후 10시 30분경에 눈을 감았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엥겔스는 유물론자답게 죽음을 매우 침착하고 안정되게 맞이했어요. 물질로부터 온 인간의 생명이 다시 물질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그는 생전에 이미 유언장을 만들어놓았는데요. 전 재산을 친구들과 맑스의 자녀들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책과 저작권 및 천 파운드에 이르는 돈을 독일 사회민주당에 기증했어요. 유언 집행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자신의 유해는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고, 그의 소원대로 유해는 화장된 후 이스트번의 해안에 뿌려집니다. 이렇게 하여 위대한 철학자의 영혼은 오늘날까지 푸른 파도 속에서 넘실거리며 외치게 되었지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입니다._『엥겔스』 중에서
무신론자인 러셀은 철학적으로 관념론자였어요. 모든 유물론자는 동시에 무신론자이지만 모든 무신론자가 유물론자인 것은 아니니까요. 무신론자인 니체와 러셀은 철학적으로 관념론자였습니다. 현대 철학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념적인 토대인 맑스주의적인 유물론과 자본주의 국가의 이념을 형성하는 관념론으로 양분되었는데요. 현대 관념론은 다시 네오토미즘이 중심이 되는 객관적 관념론과 기타의 부르주아 철학을 주도하는 주관적 관념론으로 구분될 수 있어요. 생철학, 실존주의, 실용주의, 실증주의, 현상학 등 대부분의 현대 부르주아 철학은 영국의 주관적 관념론자 버클리의 이론을 답습하고 변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생철학에서 출발하여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신비적이고 주관적인 경향과 콩트에서 출발하여 분석 철학으로 이어지는 실증주의는 외견상 상반되는 것 같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합니다. 다 같이 주관적 관념론으로 유물론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지니거든요. 러셀의 철학은 실증주의의 맥락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을 부정하고 철학 을 과학의 수준에 머물게 했어요.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해주는 세계관의 역할이 배제될 때 철학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러셀의 주장과 달리 많은 젊은이들이 철학 속에서 영웅적인 치료약을 발견했으며 자기의 이상을 위해서 삶을 희생했으니까요._『러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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