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기에,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게 된다. 의인들이 그러하듯, 사람은 지배적인 구조를 거스르며 스스로 옳은 것을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다. 구조를 바꾸겠다는 정치세력을 만들고 지지하는 일도 사람의 몫이다. 시스템이 미처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전문성과 판단력을 발휘해 일을 해낼 수 있다. 시스템이 바라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사람은 바라볼 수 있다. 망가진 시스템을 청산하는 일도, 좋은 시스템을 세우는 일도 모두 사람의 일이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시스템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p.8
지난 1년 6개월간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매번 망설였다. 인간의 선함과 시민의 자발성을 전제한 이야기는 언제나 나이브하다는 비판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럼에도 그 전제를 별다른 논증 없이 고집스럽게 밑바탕에 깐 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시민의 선한 의지 없이 우리 사회가 지속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사회의 지속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시민이 선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이브하다’는 비판에 이렇게 답할 수밖엔 없다. 나는 앞으로 더욱 더 적극적으로 나이브할 것이라고.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동료 시민들의 존재가, 내 믿음의 강력한 근거다.
---pp.12,13
물론 국가혁명배당금당은 정상적인 정당이라기엔 문제가 많은 ‘사이비 정당’이다. 공약들은 실현 가능성을 찾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1인의 사당이라는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중략)…그래서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사자 1000명의 예비후보 출마’라는 성과를 아프게 주목한다. 이 ‘사이비 정당’이 종로3가에서 10여 년간 꾸준히 사람들을 모아오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를 모아내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요양보호사, 미화원, 백화점 아르바이트, 페인트공들과 만나길 주저하지 않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비록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듣기에 구체적인 정책을 피부에 와닿게 제시하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떤 정책을 개발하고 또 알리고 있었던가. 왜 ‘진짜 정당’이 있어야 할 곳에 ‘사이비 정당’만이 있었는가.
---pp.21,22
‘원칙을 어겨서라도 승리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라는 것이 현실주의의 약속이다. 하지만 벼랑 끝이라는 위기의식은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나중으로 미루게 한다. 청와대를 차지하고 대법관을 차곡차곡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웠으며 국회에서 절대 과반을 이뤘지만, 차별금지법이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민감한 쟁점들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더불어민주당이 어떤 정책을 펼치기 위해 집권하는 게 아니라 오직 집권만을 위해 정치를 수행하는 일종의 ‘집권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위기의식 자체가 막연하게 상상된 것이므로 현실에는 벼랑 끝을 벗어날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들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위기의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정치적인 결정들을 검토하다 보면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정말로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성가족부 장관으로부터 “성인지 학습기회” 운운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미투 고발자들, 차별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들, 지금도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이야말로 높고 가파른 절벽 끝에 매달린 존재들이지 않은가.
---pp.61
선거제도는 중요하나, 그게 모든 것은 아니다. 당장 제20대 총선은 선거제도가 바뀌기 전이었지만 절묘한 균형을 이룬 다당제를 탄생시켰다. 당시 새누리당의 계파 갈등과 국민의당의 지역정당 전략이 적중한 결과였다. 제21대 총선에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돼 소수정당의 약진이 기대됐지만, 양당제의 압력 속에서 ‘1.5당제’로 귀결됐다. 요컨대 선거제도의 작동방식은 한 사회의 통치체제, 사회구조, 정치문화, 시민들의 민주주의 경험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결정된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바꾸자고 말하려면 결국 선을 넘는 수밖에 없다. 국민감정에 도전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고, 현실적인 불가능성에도 기꺼이 도전하며, 독단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시선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진보정치의 성장을 위해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며, 선거제도가 취지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통치체제와 공직선거법 및 선거보조금제도 등을 함께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p.89,90
그러므로 때로는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정쟁 사안보다 신문 귀퉁이에 실려 있는 비쟁점 사안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갈등은 지저분하고 협치는 아름답다는 프레임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 양당이 어떤 사안에 원만하게 합의하는지에 더 시선을 둘 때 우리는 이 양당제 체제의 진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치의 장에서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은 자본의 이익에 노동의 이익이, 양당의 이익에 나머지 정치집단의 이익이, 정치인 개개인의 이익에 시민들의 이익이 ‘양보’되고 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p.105
그렇다면 ‘팔리는 기사’는 무엇인가. 국민감정에 호소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부추기고, 사회적 소수자를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 논쟁을 만들고, 주목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맥락을 왜곡해 침소봉대하는 기사들이다. 여기서 나아가 정치적 성향에 호소하는 기사들도 있는데, 이런 기사들에 대해 언론학자인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해장국 언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누가 나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가’, 이 여부에 따라 ‘기레기’와 ‘참언론’을 가른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논객과 선동가를 다루는 매체에 아낌없는 지지와 후원을 보낸다(〈미디어스〉, 2019년 12월 2일자, 「강준만 “‘해장국 언론’을 갈망하는 게 당면한 현실”」).” ‘기레기’라고 욕먹어도 어쨌거나 그런 기사들은 잘 팔리고, 결국 언론사의 생존에 보탬이 된다.
---p.111
그러고 보면 오랫동안 위선이라는 단어는 진보진영을 향해서만 쓰여왔다. 이른바 ‘입진보’라는 말은 ‘진보진영의 위선’을 함축하는 말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말을 풀어쓰면 이런 뜻일 것이다.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척은 다 하더니, 너희도 똑같이 더러운 놈들이었어.” 동물권단체 케어, 〈경향신문〉, 그리고 〈한겨레〉에 대한 냉소들 역시 이 맥락에 있다.
그러나 위선에 반발하여 향한 길이 ‘똑같은 더러움’이어선 안 되는 것 아닐까. 어떤 대상이 위선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들, 그 대상이 좇던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며, 쉽게 냉소하고 내다 버리기엔 우리 사회에 선한 가치를 가득 채우는 일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척’에서 ‘척’을 떼어내는 것, 즉 ‘진정으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을 좇는 일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러한 가치를 좇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pp.137,138
산재를 추방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사연이 슬프고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일을 하다가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재의 완전한 근절은 정치인과 기자들이 대구?부산?김해의 ‘이야깃거리 없는’ 죽음들에 대해서조차 관심을 가질 때에야 가능해진다. 이들의 죽음이 동등하게 조명될 때라야 매년 2000여 명이 질병과 사고로 사망하는 산업재해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전보다 이윤’을 택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이 문제를 방치하거나 쉬쉬하는 정치의 문제다.
한 가지 더, 정치인과 기자들만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왜 정치인과 기자들은 ‘이야기가 되는 곳’만 찾아가는가. 이는 물론 우리 대부분이 ‘이야기’가 있어야만 관심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속에 섞인 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을 너무 무심하게 넘겨 버려온 우리가, 오늘도 대여섯 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적 일상을 만든 공범인 것은 아닌가.
시인 김시종이 5?18을 마주하고 쓴 〈명복을 빌지 말라〉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날이 지나도 꽃만 놓여 있다면 애도는 이제 그저 꽃일 뿐이다.” 그렇다면 꽃조차 놓이지 않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pp.144,145
그러므로 차라리 다시 한번 구호를 외치겠다. 지금도 거리에서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있을 구호들이다. 산재는 살인과 다를 게 없다.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현장은 노동자가 가장 잘 안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라! 규제만 지켰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산업현장 안전규제 대폭 강화하라! 기업 처벌 강화가 안전 강화의 지름길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 위험의 외주화를 금지하라!
누군가들은 이 같은 요구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2020년에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 더욱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매년 2000명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노멀’은 이제 그만하자.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뉴노멀’ 말고, 이들 노동자에게 절실한 ‘뉴노멀’을 기다린다.
---pp.163,164
우리가 불편하고 손해를 봐야 지속할 수 있는 노동과 문화가 존재하고, 노동과 문화가 계속되어야 그것의 편익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이것은 사회적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건강한 순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장은 사람을 쥐어짜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슈퍼마켓 계산대 여자’들이 그렇듯이 그것은 언젠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로다.
“우리가 없애고 쫓아냈다”라는 말의 의미는 죄를 추궁해 벌을 주자는 게 아니다. 현명한 소비는 불법이 아니고, 우리는 사람을 쥐어짜서 돌아가는 자본주의 구조의 주범이 아니다. 사과를 요구할 일도 아니다. 다만 지속 불가능한 체제가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은/못한 ‘사회구조의 동참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부채감을 가져야 한다는 윤리의식에 대한 얘기다.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그리고 함께 이 구조 속에서 벗어나오자고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정치에 대한 얘기다.
---pp.196,197
시스템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시스템이 아무리 잘 구축돼 있어도, 결국 그것을 의도대로 작동시키는 것은 시민들이다. 시민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재난을 넘어설 시스템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는 종종 손해가 동반된다. 손해를 감수한 실천이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그렇기에 실천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의민주주의와 구조만능주의는 시민들에게 일종의 알리바이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할 책임은 선출된 정치인들과 녹봉을 받는 관료들, 그리고 그들이 구축해야 할 시스템에 있으니, 시민들은 죄를 짓지 않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으며 그저 열심히 먹고사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이라는 알리바이 말이다. ‘구조가 문제인데 왜 내게 손해 보기를 요구하는가. 내게 어떠한 책임도 요구하지 말라. 구조를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재난이 확인시켜줬듯 시민들이 책임과 의무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재난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 이르러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pp.211,212
한국에서도 비슷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싸우자’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남을 챙기냐는 소리가 단박에 나온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당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대학생인 당신도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고, 남성이라면 딸이나 여자친구를 위해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고, 비장애인인 당신도 어느 순간에 장애를 입을 수 있으니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한 인간에게 기대되는 측은지심이나 한 사회에 기대되는 연대의식을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샌더스는 그러한 우회를 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민들의 측은지심과 연대의식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정공법을 택한다. “이 선거운동은 단지 나(버니 샌더스의 당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대의 운동을 만드는 것과, 우리 중 누군가 아프면 우리 모두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유튜브 〈Bernie Sanders〉 채널의 「Our Stories」 영상).” ‘나의 문제’는 힘이 세지만 항상 평등하게 작동하는 논리는 아니다. 어느 순간 나이브한 것이 되어버린 타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이 민주주의와 건강한 사회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샌더스는 그의 지지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주장하고 설득한다.
---pp.233,234
내 삶이 변해온 경로들을 부끄러워하면서, 동시에 ‘흑역사’라고 묻어버리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그래서다. 어느 시기의 나도 조롱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변화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데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일 테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내가 걸어온 경로를 빠짐없이 되새기며 배운다.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