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 달라요. 예술가나 영화감독, 자기 작품 만드는 사람은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무조건 자기 스타일대로 살면 다 새로워요. 그래서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앞사람을 표절하면 안 된다는 덕목도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흉내 내면 안 돼요. 그게 글이든 영화든 삶의 스타일이든. 형이 결혼했다고 자기도 결혼해? 촌스러운 거죠.(웃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애정, 하나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가지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아요. 자긍심이 있어야 해요. 자유정신만이 자긍심을 가져요.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땡큐’인 거죠. ‘내가 무서운가 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야’ 이런 정신이죠.
김어준 같은 경우 사인해줄 때 이름 쓰고 “쫄지 마 씨바”라고 쓰잖아요. 그 말이 실은 자유정신이에요.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김어준을 높이 평가해요. 처음 딱 만났을 때 이런 사람 참 드문데 싶었어요. 자기만의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김어준이 사람들한테 쫄지 말라고 하는 얘기는 김어준을 따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따라 하는 것도 김어준에 대한 배신이에요.--- p.21
20년 동안 망가진 아이는 회복되려면 다시 20년이 필요해요. 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면 결코 문제를 못 풀어요. 인간이란 것이 어렸을 때 부모 잘못 만나 한 30년 망가졌으면 그 사람 정서를 쓰다듬어주는 데 30년을 투자해야 하는 법인데, 우리는 집단적으로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는 거예요.
사람을 죽일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이 안 읽혀야 해요. 그러니까 살인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못 읽는 거예요. 진짜로 저 사람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목을 졸라요? 가까운 사람 죽일 때도 보면 술 취해서 죽이잖아요, 우발적으로. 아이들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데, 경쟁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경쟁 때문에 아이들이 옆의 아이를 응시하지 못해요. 그 고독 속에서 아이들이 죽는 거고 폭력적으로 나오는 거죠.--- pp.58-59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 좋은 예예요. 그 조건 아세요? 다른 남자와 자도 되는 거예요. 카페에서 사르트르가 담배 피우고 있는데, 보부아르가 옆에서 영화배우랑 뽀뽀해도 참아야 해요. 그래도 둘이 나중에는 무덤에 나란히 누워 있잖아요. 소유하지 않고 풀어주려고 하니까 그만큼 더 소유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순환하는 거예요. 자유로우니까 소유하고 싶고, 소유했을 때 자유를 주려고 하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을 실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결혼 제도는 그 자유를 붕괴시킨 거예요.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다고 생각해요. ‘나는 끝났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웃음)
제자들에게 연애는 좋은 거니까 부지런히 사랑하라고 해요. 성숙해질뿐더러 타인이 자유롭다는 것을 배우는 기회니까요.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명박 같은 사람들은 사랑을 못 해봤다는 결론에 이르러요. 여자가 성적 대상일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제자들에게 연애는 해도 좋은데 결혼은 하지 말라고 해요. 아니, 결혼은 좋은데 애는 낳지 말라고. 애를 하나 낳은 제자한테는 둘은 낳지 말라고, 둘 낳은 제자한테는 셋은 낳지 말라고 해요.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고.--- pp.82-83
《김수영을 위하여》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시가 〈달나라의 장난〉이에요. 1953년에 쓴 시인데 1959년에 나온 첫 시집의 제목이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것은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왔을 때쯤 이미 모든 것이 싹텄다는 얘기예요. 〈달나라의 장난〉은 팽이 도는 얘기로 시작해서 이렇게 끝이 나요. “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해서는 공통된 무엇으로 돌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팽이 두 개가 돌다가 부딪히면 둘 다 넘어지거나 하나가 넘어지잖아요. 김수영이 생각하는 독재란 거대한 팽이 한 놈이 다 자기처럼 돌라고 하는 거예요. 김수영은 자기 혼자 돌아야 한다는 거구요. 그게 자유예요.--- p.146
제자백가가 활동했던 기간이 400년이니까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태어났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거예요. 평화를 본 적이 없어요. 전쟁 상황에서는 인간이 바닥까지 가요. 그러한 절망 속에서 온갖 생각을 다 해보는 거죠. 어차피 삶이 바닥이니까. 전쟁으로 바닥을 봤기 때문에 뭐가 더 중요하고 말고가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이 절망적인 바닥의 상황에서는 중요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제자백가의 특징이 아무 말이나 다 던져도 되었다는 거예요. (중략) 제자백가 시대에 상용어가 ‘도’예요. 길, 정확하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이에요. 그게 다 끊어져버린 상황에서 제자백가는 그 길이란 무엇인가, 그 길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렇게 갔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길을 제시한 거죠. 공자의 도, 묵자의 도, 노자의 도, 장자의 도, 이런 게 쭉쭉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 바닥을 쳤을 때, 공동체가 와해되어 버렸을 때 이 사람들이 꿈꿨던 길들의 가짓수가 다 나왔다고 보면 돼요.--- pp.240-241
《장자》 〈제물론〉에 도행지이성道行之以成이라는 구절이 나와요. ‘도는 걸어가야 만들어진다.’ 이 구절을 발견한 게 논문을 쓰게 된 계기예요. 노자는 그렇지 않아요. 도가 미리 있거든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의 어머니가 도이니 어머니를 따라서 가자.’ 왕필이란 노자 주석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본말’이라고 해요. 뿌리 본 자와 가지 말 자. 모든 가지들은 발악하지 말고 서로 다투지 말라는 거예요. 뿌리는 하나니까. 그 뿌리가 도라는 건데요, 그러니까 그 도에 의존하지 않으면 가지들은 다 죽는 거예요. 그게 노자 철학이에요. 도가 미리 있어요. 옛날에는 《장자》를 읽으면서도 ‘도행지이성’이라는 구절을 놓쳤어요. 도는 걸어가야 만들어진다는 얘기는 마치 눈이 쌓였을 때 눈길을 걸어가면 뒤에 길이 생기는 것 같은 거예요. 길이 나중에 만들어져요.--- pp.334-335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사람인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p.443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예요. 그래서 저도 제가 하는 인문학을 사랑과 자유에 바쳐야 하고요. 그래도 훌륭하지 않나요? 한국에서 인문학 하기 더럽게 힘들거든요. 흉내만 내느라고. 다행히 제게는 김수영이 있었어요. 그리고 김수영과 바이런, 니체와 장자, 그리고 기타 여러 진정한 인문학자들 사이의 공통점이 뭔지를 안거죠. 그들이 어떤 디테일을 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관통하는 정신이 중요한 거고요.
어쨌든 제 독자들이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인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도 거기에 있어요. 다른 가치들은 없어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상 사랑과 자유가 가장 중요하죠. 이게 마지막 말이에요.
--- p.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