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연보 작성에는 문학과지성사의 《최서해 전집》과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에서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에서 부친 최씨와 모친 김능생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아명은 저곡苧谷이나 이 이름의 사용 여부는 불확실하며 지명인 듯하다. 본명은 학송鶴松이고 호는 설봉雪峰이다. 부친으로부터 혹은 서당은 통해 한문 공부를 한 듯하다. 성진보통학교를 중퇴한 것(3학년 또는 5학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신학문과 관련된 읽고 쓰는 능력의 발달 정도로 보면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은 지방의 소관리였던 듯하다. 독립군이란 설(김동환)도 있으나 불명확하며 일제 강점기 이후 가족을 돌보지 않은 듯하다. 모친은 바느질과 돈놀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형제로는 누이하나(청진 토박이에게 출가했다가 기생이 되었다)와 여동생 하나가 있다.
1905년 함북 성진시 한천리 254번지에 사는 숙부 김순기의 집에서 기거했다.
1910년 이즈음에 부친이 간도 지방으로 간 듯하다. 부친이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 서해가 부친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는 것은 개인사의 비극이지만 역사적인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 부친의 존재는 〈홍염〉에서와는 달리 미미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913년 신소설과 구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잡지 《청춘》과 《학지―1915년 광》 등을 사서 탐독했다.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1918년 이광수의 소개로 《학지광》에 세 편의 수필(〈우후 정원의 월광〉 〈추교의 모색〉 〈반도 청년에게〉)을 발표했다. 어머니와 간도로 들어가 유랑생활을 했고 뻬허에서 농노 생활을 했다.
1920년 한 여성과 동거했으나 빈곤으로 헤어졌고 곧 다른 여성과 재혼했으나 사별했다. 뻬허에서 야반도주한 뒤 음식점 머슴, 정거장 목도, 중 노릇 등을 전전햇다. 시인 조운을 만났다.
1921년 서간도에서 세 번째 여성과 결혼하여 첫딸 백금을 낳았다.
1923년 얼따꼬우에서 살다 봄에 귀국, 회령 부근 어느 정거장에서 콩 자루를 날라주는 등의 노동을 했다. 시조 〈춘교에서〉, 수필 〈고적〉이 《동아일보》에 게재되었고, 소설 〈누구의 편지〉와 〈평화의 임금〉은 《신생명》에 게재되었다. 시 〈자신〉을 《북선일일신문》에 투고했고, 서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단편 〈토혈〉을 《동아일보》에 투고, 독자란에 게재되었다.
1924년 1월에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에 발표되었고 이어서 〈매월〉을 발표했다. 11월에 이광수를 찾아 노모와 처자를 살던 곳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상경했다. 잠시 김동환의 집에 기거했고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로 들어가 중 노릇을 했으나 주지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왔다. 아내가 시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에 입사했고 조선문단사 사주 방인근의 집에서 기거했다. 8월에 김기진의 권유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카프)에 가입했다. 10월에 조선문단사를 퇴사했다. 《조선문단》에 〈13원〉〈탈출기〉〈살려는 사람들〉〈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평론 격인 〈근대독일문단개관〉 등을 발표, 문단의 중심적 작가가 되었다.
1926년 정초에 조선문단사의 수금차 지방 순회 중 영광의 조운 집에 들렀고 이때 그의 누이 분려와 사귀었다. 4월 8일에 조선문단사에서 최남선의 주례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광수와 불화했다. 6월에 조선문단사가 휴간되자 퇴사하고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얼마간 종사했다. 단편 〈폭군〉〈설날밤〉〈의사〉〈5원 75전〉〈백금〉〈해돋이〉〈그믐밤〉〈누가 망하나〉〈농촌야화〉〈기아〉〈8개월〉〈이역원혼〉〈동대문〉〈무서운 인상〉 등을 발표했다. 창작집 《혈흔》 출판.
1927년 1월에 장남 백白을 출생(이은상의 부인 김신복의 도움)했다. 같은 달에 범문단 조직인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방인근으로부커 남진우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되자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위원이 되었다. 5월,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 작법론’을 강연했다. 10월에 경영난으로 다시 퇴사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의 편집을 맡았다. 단편 〈미덥지 못한 사랑〉〈홍염〉〈전아사〉〈쥐 죽은 뒤〉〈서막〉〈낙백불우〉 등을 발표했다.
1928년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카프)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 되었다. 단편 〈갈등〉〈폭풍우 시대〉〈사랑의 원수〉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중외일보》 기자가 되었고 《신생》지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었다. 카프 탈퇴. 단편 〈행복〉〈인정〉〈먼동이 틀 때〉〈주인 아씨〉〈같은 길을 밟는 사람들〉〈잊지 못할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1930년 두 살된 둘째딸 사망. 단편 〈누이동생의 길을 따라〉와 장편 《호외시대》를 연재했다.
1931년 5월에 창작집 《홍염》을 간행했다. 최독견의 후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위병 악화.
1932년 경성 의전병원으로 옮겨져서 7월 9일에 위암 수술을 받고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위문 협착증. 당시 가족으로는 어머니, 부인, 아들 백白과 택澤이 있었다.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였고 장지는 미아리 공동 묘지였다. 7월 25일에 유족 구제 발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