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자국 사회와 통합을 거부하는 600만 무슬림 인구를 거느린 프랑스를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섰습니다. 이번 세기 중반쯤 되면 프랑스는 다수의 백인 노령층과 그들보단 소수이지만 젊고 강력한 이민자들로 양분될 것입니다.”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진행된 그 날의 토론에 패널로 참석한 송우석이 차분하면서도 냉소적인 얼굴로 말했다. 마른 체구에 잘생긴 얼굴,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오십 대 초반의 남자 송우석은 보수 논객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잦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게 볼 수 없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독특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시사평론가였다.
--- p.8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공격적인 활동을 펼치기로 유명한 단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의 대표 한성주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열악한 분야에서 일하며 우리 경제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농업, 어업, 건설업, 주조, 용접 같은 분야에서 말입니다. 이 분야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지만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 pp.9-10
그렇고 그런 기사들의 목록을 천천히 훑어 내려가는데 갑작스럽게 그의 주의를 잡아끄는 기사가 나타났다. 그것은 「이주 노동자 인권 활동가 한성주 대표 실종」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그는 서둘러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에 따르면 한성주가 종적을 감춘 건 지난 8일 저녁이라고 했다. 함께 일하는 직원의 말에 의하면 한성주는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 9시쯤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남양주에 있는 그의 집 근처 CCTV에는 귀가하는 그의 모습이 찍혀 있지 않았다.
--- p.93
가난한 대학중퇴생인 그가 무슨 돈으로 한 달이나 차량을 렌트했으며, 시신을 유기한 지역의 호텔에서 나흘이나 묵었는지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범행을 전후한 일주일 동안 그가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돈을 헤프게 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모든 일을 이유로 종훈은 누군가, 또는 어떤 조직이 심승우에게 범행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제공했고, 성공했을 시 성공보수까지 약속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런 의심을 뒷받침할만한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갖고 있지 못했지만 말이다.
--- pp.119-120
한성주의 죽음과 관련해 일종의 반전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 것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발단은 모 인터넷 언론사가 공개한, 익명의 제보자가 제공한 한성주의 수첩이었다. 그 작은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는 글들은 필체 감정 결과 한성주의 필체가 확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된 그 기록의 요지는 이랬다.
'포용과 융합의 다문화사회로 가는 여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회유와 위협, 폭력도 허용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허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맹목적이고 가치전도적인 글이었다. 읽어나가는 사람의 소름을 돋게 만드는.
이런 글이 그토록 호감 가는 외모의,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희생된, 신화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청년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pp.170-171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한성주 대표라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목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으신지 말입니다.”
박 목사는 찻잔을 들어 율무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성주 형제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박 목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계속해서 말했다.
“성주 형제는 진심으로 이주 노동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예,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뜨겁게 그 자신도 그들 중 하나인 이주민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지요.”
“그게 무슨 뜻이죠?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다는 것 말입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인간의 방법만이 남을 뿐이며 인간의 방법으로 목적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