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주의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인창서관, 1970)와 김동인의 《문단 30년의 자취》를 기초로 추정한 것이라 연도나 세부 사실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1893년 출생연도 미상. 유방 김찬영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1893년 생이 아닐까 짐작. 고향은 평안도 진남포.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으며, 형은 진남포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어릴 때 절에 있다가 향학열 때문에 절에서 나와 고학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1920년 《매일신보》에 소설 〈춘희〉를 비롯하여, 일련의 유미주의적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1921년 3월에 《창조》 동인이 되었다. 여전히 동경에 거주하였다. 3월에 〈이단자의 경구〉를 발표한 이래 《개벽》지에 유미주의와 표현주의, 악마주의 예술론을 소개하였다.
1922년 동경에서 연인 관계였던 김명순과 함께 토월회에 객원으로 참가. 김명순과 헤어지고 김원주와 사귀기 시작했다.
1924년 《영대》 편집 겸 발행. 《영대》 창간호에 〈예술지상주의의 신자연관〉을 발표한 이래 악마주의적 경향의 소설들을 실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 나와 김원주와 동거 생활을 시작하며 교사 생활을 했다.
1926년 김원주와 헤어지고 동덕여학교 출신 양○순과 결혼, 3남매를 두었다.
1932년 이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사십구재는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이 지내 주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