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문기자로 일해 왔고 그래서 무엇이든 새로운 걸 배우면, 기사로 써볼 궁리를 하곤 했다.
아니 꼭 기자가 아니라도, 배운 걸 써먹지 않으면 배운 게 의미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는 주의이다. 기자이기 때문에 그 방식이 글쓰기였을 뿐.
2016년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고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기초자산(기초상속) 개념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이걸 어떻게 기획 기사로 써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해 휴직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종로도서관과 사직공원을 어슬렁거리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었다.
‘모든 청년들에게 얼마만큼의 사회적 상속을 한다.’ 기획기사로 써보고 싶었던 이 기초자산 제도는 흔하고 흔한 제도소개 기사 이상은 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접었다. 기사의 형식이란 제한이 많다.
그런데도 아마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막연한 이미지들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심정이 머릿속에서 많이 떠돌았다.
난 영이가 살고 있는 체부동에 산다.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내가 살고 있기 때문에, 영이를 그곳에 살게 한 것일 거다.
집 근처 종로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빼내어 볼 때는 그 냄새가 좋고 마음이 설레서, 밤에도 여기서 책을 읽거나 여기서 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현명한 이들이 몇백년 전에 이미 생각해 놓은 골똘한 정신들은, 왜 현실에 펼쳐지지 못하는가도 생각했다. 자연이 준 공동자산인 땅은 왜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렸는가도 생각했다. 어떤 돈이 있을 때, 그 돈의 진짜 주인은 누구이고 누구여야 합당할까, 또한 생각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간의 돈이 꼭 필요한 가난한 청년에게, 임대사업자 아버지가 집에 보관해놓은 현금다발을 몰래 빼내가져다 주는 아이를 생각했다. 기초자산 제도가 있다면 그 돈은 합법적으로 그 청년의 몫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아니다.
그런 생각들에 잠겨서 주변 인왕산 자락길을 오를 때면, 초록 나뭇잎들이 만들어 내는 그 빛나는 공간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난 영이에게, 상만에게, 세주에게, 민이에게, 을순 할머니에게 조금씩 이런 것들을 투영했다. 공간과 상관없이 늘 나를 괴롭히던 의문과 분노, 그리고 대처방식 또한 투영해봤다.
그래서 소설을 쓸 생각도 없었는데 소설을 썼다. 이들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영이가 상만에게 느티나무 몸통이 보도블럭에 막혀 더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대목을 쓴 뒤에는, 난 상만을 대신해서 종로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며칠 후에 종로구청에서 나무를 둘러싼 보도블럭들을 제거했다고 사진을 찍어서 민원 게시판에 올려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주인공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분이 있다면, 늘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