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쳐다본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방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벽 자체에도 여성의 창조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어머니도 자기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 그렇게 성을 내고 마는 것일까? 새벽에 깻잎에 간장을 바르던 어머니가 기대어 있던 벽, 자다 깨어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쳐다보던 벽, 내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다가 마주 보게 되는 벽, 새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벽. 그 벽 안에는 무슨 말이 켜켜이 있을까? 벽이 모두 거울이라면 여자들은 자기 얼굴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을까?
--- p.48~49
엄마가 들은 말, 엄마가 들어서 나에게 전해 주는 말. 집에 있으면 집에 갇혀 있었던 여자들을 향한 이런저런 소리가 떠오른다. 미신, 통념, 학대, 편견. 그런 악의로 찬 속담이나 저주들이 떠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 그 말들에 맞서 한 걸음씩 내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집 안에 있어도 나는 집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과 싸운다.
--- p.51
나는 이 집에서 살면서 말 잘 듣고 착한 딸이 되고자 했을 뿐, 묵묵히 공부만 했을 뿐 “아파요.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나의 집을 지키고자 할 뿐 집들을 맘속으로라도 우그러뜨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휘청이고 무너지는 집의 그림자를 이고 양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대는 나의 그림자를 마주한 것이다.
--- p.90
어머니는 여자가 배우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이 셔츠를 던지든, 딸이 도시락을 팽개치든 다 견뎌 낼 수 있었다. ‘내 딸은 가르치고 말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견뎠다. 세상의 엄혹함과 어두운 현실을 아는 어머니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에게 자신의 진짜 경험을 알리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배우지 못하고, 반말을 듣고, 자고 싶어도 뜬눈으로 밤을 새워 일해야 했다. 아직 어린 자신의 월급에 기대어 사는 동생들이 다섯이나 있었고 심지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도 그에게 기대었다.
--- p.109
해마다 나는 내가 왜 서울에 있을까, 서울에 계속 살 수는 있는 걸까, 그냥 내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버릴까 생각하며 집세 걱정에 시달렸다. 단 하루도 집세 걱정을 하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집세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몸이 지쳐도 내키지 않는 일이어도 집세를 충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일을 맡아 해내곤 했다.
--- p.124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는 낮은 가옥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고, 처진 전깃줄들이 드리워 있는데 호젓하고 한적한 느낌이 든다. 집을 구하러 다닐 때 마치 어린 시절의 골목길을 떠올리게 하는 그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가만한 걸음들과 쓸쓸한 한숨들과 정답게 두런거리는 이야기들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풀들이 바람에 소리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아 주는 이 없어도 살아가는 자리가 만들어 내는 흔들거림인 것이다.
--- p.128
이제 길에서 마스크를 코끝까지 눌러쓴 사람을 마주치면, 그 사람이 궁금해지기 전에 감염에 대한 두려움부터 일어난다. 사람을 만나 먼저 몸이 움츠러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나는 생각뿐 아니라 몸의 감각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잠깐 같이 서 있는 게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 p.134
그는 나처럼 싸우고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만의 집을 지키기 위해, 그가 오늘 내린 선택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 보면 집과 삶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위험과 맞서 일하는 이들의 얼굴이 있다.
--- p.139
방에만 있었으면 듣지 못했을 사람들의 소리, 보지 못했을 사람들의 모습, 느끼지 못했을 다양한 감정, 그런 것들이 있어 사람들은 카페를 지키고 드나들었다. 조명이 꺼지고 인적이 끊긴 카페 안을 창밖에서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만들어 내었던 활기와 확고함이 그립다.
--- p.214
어머니가 맞바꿀 수 없는 것은 이 집에 배인 자신의 시간이었다. 누런 벽마다 배어 있는 식구들의 흔적이었다. 매년 자란 아이들의 키 높이대로 새로 난 눈금들이 있고, 손때가 묻어 있는 낡은 벽. 벽에서 차가운 외풍이 들어오고, 올가을부터 급기야 비가 새기 시작해서 누전의 위험까지 있는데도 어머니는 이 집을 사랑했다.
--- p.248~249
집이 부서지고 나서 흙더미만 남은 자리를 아버지는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 주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되었단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없이 흙더미만 쌓인 자리를 마지막까지 ‘우리 집’이라 불렀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