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부처와 그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의 문답 내용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붓다와 수보리의 대화’이다. 이 경 앞부분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한 것은 붓다의 입멸 이후, 붓다의 측근 시봉侍奉이었던 아난阿難이 500여 아라한阿羅漢 앞에서 자신이 들은 내용들을 구술口述할 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유래된 것이다.
이에 따라 팔만대장경의 첫 장 첫 구절은 대개 이와 같이 ‘여시아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여시如是’는 『금강경』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붓다가 생전에 설한 것을 화자話者인 아난존자 개인의 독단이나 편견이 아님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따라서 『금강경』뿐 아니라 경전 대부분의 서두는 모두 ‘여시아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단 이 경을 한역한 구마라집은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에서 ‘여시아문’ 이라고 하였으나, 구마라집보다 약 150년 앞선 강승개康僧鎧는 조위曹魏 가평4년(嘉平, AD.252)에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을 한역하면서 ‘나는 들었다. 이와 같이[我聞如是]’ 라고 하여 ‘아문’과 ‘여시’를 도치倒置하였다.
--- p.35~36
붓다는 이러한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모든 중생을 적적요요寂寂寥寥한 안락세계로 이끌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 붓다는 다시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없이 많은 중생을 구하려 해도 실제로 멸도를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며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붓다는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을 받고 ‘어떻게 이런 훌륭한 질문을 하였는가![善哉善哉]’ 라고 칭찬하면서 ‘ 선남자선여인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땅히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다스릴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라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제3 「대승정종분」에서는 청천벽력같이 냉철한 어조로 돌아서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그런 다음 ‘왜 그런
가?’라며 그 까닭을 설명한다.
이것을 육조 혜능은 “ 일체의 미혹한 사람이라도 자성을 깨닫게 되면, 부처는 스스로의 상相도 보이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도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니, 어찌 중생을 제도했다 하겠는가! 다만 범부가 자기 본심을 보지 못하고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해, 모든 상에 집착하여 무위의 이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인我人을 없애지 못하므로, 중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이 병을 여의게 되면 실제로 중생이 멸도를 얻었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망심이 없는 곳이 바로 보리菩提이고, 생사열반이 본디 평등하여 없는 것인데 어찌 멸도가 있다고 말하는가!”라며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 p.63~64
요컨대 붓다의 교설을 이해하려고 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공空과 무無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이해이다. 흔히 공은 비었음을 말하지만, 불가의 본디 뜻은 ‘텅 빈 충만의 세계’로서 진실로 비웠을 때 드러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이다. 이러한 공의 세계는 무無를 품고 유有를 드러내어 끊임없이 생성과 파괴를 되풀이하는 무한생명無限生命으로서 무한의식세계無限意識世界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이해이다. 즉 ‘있음’은 ‘없음’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없음’은 ‘있음’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일 수 없고, 긍정은 긍정을 위한 긍정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無我와 무심無心이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자아自我는 두고 불필요하게 망상을 부리는 가아假我를 구분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 p.86
예컨대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보시한다는 것은 세간에선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보시도 ‘베푼다는 상相’을 지닌 보시는 언젠가는 무너져 사라지기[有相有限] 마련이다. 하지만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으로 맑고 깨끗하게 이끄는 법보시는 상이 없고 담박하여 없어지지 않는다[無相無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의 제목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무위의 복덕’이 ‘대가를 바라는 유상유위의 복덕’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재보시와 법보시를 규봉 선사는 “보시는 생사生死에 감응感應함이요, 경經은 보리菩提로 나아감이니, 큰 뜻은 위의 경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또 야부 선사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알 수를 헤아림은 한갓 힘만 허비함이니 / 곳곳마다 홍진紅塵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라 / 어찌하여 내 집의 진귀한 보배를 꺼냄이 / 고목에 꽃 피우는 특별한 봄만 같다 하리오!”라며 항하사를 헤아리듯 하는 재보시財布施와 내 안의 자기를 밝히는 법보시法布施를 비유하여 읊었다.
--- p.151~152
요컨대 붓다가 지금까지 설한 것은 ‘불성佛性이란 의식意識을 넘은 무의식無意識에 바탕 한 무위법으로, 이러한 무위법을 깨달았을 때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위법은 누가 알아서 안겨 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에게 본디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로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메시지이다. 요컨대 붓다가 연등불이 지닌 법을 이어받은 바가 있다면, 결코 연등불의 수기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말하는 불성에 이르고자 하는 법은 문자 그대로 특정한 모양[相]이나 집착이 없는 무위無爲이다. 만약 모양과 집착이 있다면 무상정등각의 지혜도 아닐뿐더러, 깨달음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에서 말하는 존재의 본질이란, 취取하거나 버림[捨]이 없는 본디의 자리를 깨달아 나도 없고 대상도 없으며, 갖춤도 없는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이다. 그래서 연등불이 석가모니붓다에게 수기한 것은 이와 같이 상과 집착이 없는 보살행을 보고 수기를 내렸을 뿐, 당시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서처럼 별도의 법을 전하거나 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구분하고자 한 것이다.
--- p.228
요컨대 여래의 법신은 상도 아니고[非相], 상 아님도 아니다[非非相]. 그러므로 옴[來]도 없고 감[去]도 없어 동動과 정靜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여래의 상相은 하늘의 달과 물속의 달로써 여래의 법신과 색신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즉 물속의 달은 비바람과 물결, 구름 등의 변화와 조건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변할 수 있지만, 하늘의 달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따라서 물속의 달이 사라지는 것은 구름이달을 가렸기 때문이며, 물속의 달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은 바람으로 일어난 물결 때문인 것으로 달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변함없는 부처의 법신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흐리고 산란하면 법신은 보이지 않고, 색신인 몸의 움직임만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의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므로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 것이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