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나쁜 부모 콤플렉스’를 품고 살아간다. 이들은 실패한 인생의 원인을 모두 부모 탓으로 돌린다. 전통적인 심리 요법 이론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한층 부채질하는데, 이것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수십 년 동안 심리치료사들은 환자의 마음의 병을 고친답시고 부모, 특히 엄마들의 실책을 끌어다 댔다. 이유도 다양해서, 때로는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공부를 강요한 탓이고, 때로는 너무 무관심하고 아이를 자주 칭찬해주지 않은 탓이다. 부모의 근심이 지나치거나 일관성이 없던 게 구실이 되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와 충분히 신체 접촉을 하지 않은 일, 함께 놀아 주거나 장난치지 않은 일도 좋은 핑계거리이다. 이런 구실에는 끝이 없다. 수없이 많은 심리학 관련서적들은 부모의 잘못된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증명하는 데만 집착한다. 이러니 젊은 세대가 부모에게 총체적인 책임을 떠넘기는 데 익숙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실제로 아동을 학대하거나 유기 또는 거부하는 부모들까지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상에는 끔찍한 가정폭력이나 기타 아이들에게 해로운 가정환경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도 간혹 부모의 양육권을 박탈하거나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 놓을 것을 권고하는 소견서를 법원에 제출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비극적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책임 의식을 갖고 자녀를 보살핀다. 지극한 애정을 통해 자녀와 정신적 연결고리를 맺음은 물론, 아이가 아플 때는 밤새워 머리맡을 지키기도 하고 언제나 아이의 장래를 염려한다. 특히 엄마들은 오늘날 가족과 직장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몇 배의 부담까지 기꺼이 떠맡는다. 이 모든 진실을 외면한 채 부모의 실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좋은 의도로 한 일이 시행착오였을 수도, 스트레스 때문에 순간적으로 잘못된 반응을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환자를 ‘잘못된 가정교육의 부산물’로 치부하는 태도는 환자가 마음의 짐을 벗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커녕 자기 발전의 다른 가능성마저도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보다 환자에게 훨씬 더 용기를 주는 일은 성숙한 어른으로서 삶을 스스로 가꾸어 갈 능력과 의무가 환자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조건을 지니고 태어난다.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결점투성이의 배경에서 삶을 시작해야만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삶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까지 그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시작 조건을 갖추고도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나쁜 조건에서 시작해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 삶을 좋거나 나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여전히 각자의 손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자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교육방식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 부모님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부모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pp.43-44
이제 태초의 인류에게로 눈을 돌려 애초에 인간을 동물과 구분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천지창조 여섯 번째 날 아침, 미처 가시지 않은 노을 속에서 인간과 더불어 탄생한 존재가 있었다.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자유는 완벽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제약이 혹처럼 달라붙어 있는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러한 제약을 극복하고 나름의 입지를 확립하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무엇인가를 할!)자유이기도 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강화하거나 억제할 수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예 무시할 수도 있다. 개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사회적 환경조건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과거를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든 잊어버리든, 불행한 과거에 두고두고 미련을 갖든 그와 타협하든 모두 개인의 자유이다. 운명을 탓하며 불평하든지 운명과 화해하든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소리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에서 ‘삭제해’ 버리고 싶은 조건들이 몇 가지씩은 있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자유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경우는 없다. 기왕에 부닥친 것이니 그에 맞서려는 태도, 그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그 조건 하에 창조적으로 발휘하려는 태도가 참된 자유이다. 앞서 이야기한 지체 장애 아동의 어머니도 이 자유를 지혜롭게 활용한 셈이다.
무엇이 그녀를 독려했는가? 자, 천지창조 여섯 번째 날 아침노을 속에서 반짝이며 탄생한 인간만의 특성이 하나 ? 있다. 빅토르 E. 프랑클의 표현을 빌리면 ‘의미를 향한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의지는 인간 영혼의 안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과 영향력이 의미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 혹은 실현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명확히 볼 수 있게 해준다. 한 마디로 인간이 그저 어영부영 살다가 명을 다하는 일이 없도록 돕는 것이다. 1971년에 나는 빈에서 행한 어느 실험(자세한 내용은 빅토르 E. 프랑클의 《의미를 향한 의지(Der Wille zum Sinn)》참조)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 참고로 이는 향후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유사한 학문적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좌절감을 과장스럽게 표출하지 않는다.(‘호들갑떨지’ 않는다.)
? 정신적으로 대개 안정되어 있다.(쉽게 동요되지 않는다.)
?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다른 이들에 비해 낮다.
?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
? 긍정적인 자세로 고통이나 문제점에 대처한다.
예의 정신 지체 아동의 어머니가 자유를 긍정적으로 활용했음은 앞서도 언급했다. 이제 그녀가 ‘무엇’에 이를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그녀는 아들의 장애를 자기 자신(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로 정의했다. ‘무엇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고, 또 베푸는지 언제나 되새기겠지요.’라는 말이 그것을 반증한다. 더불어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다’는 말은 그녀의 용감한 마음가짐이 비옥한 결실을 맺었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을 행할 자유를 선택한 이상 불운도 더 이상 그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한다. 설령 그러한 결의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안에 불과하더라도 효과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날마다 조금씩 그는 어두운 밤으로부터 빠져나와 마침내는 눈부신 아침노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pp.133-135
연장을 만드는 장인과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길러낸 쉰다섯 살의 가정주부가 있었다. 불행히도 자녀들 중 막내였던 딸이 스물다섯 살의 꽃다운 나이에 대형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딸은 사고 후 7주 동안 인공호흡장치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갔고, 모친은 딸이 숨을 거둘 때까지 한 순간도 침대 맡을 떠나지 않았다.
딸을 잃은 충격으로 이 여성에게는 심한 우울증이 덮쳐왔다. 그녀의 마음의 병은 오랜 심리 치료(나는 당시 그녀의 치료를 맡았다)를 거치면서 힘겹게 나아졌지만 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인은 조용히 은둔하는 삶을 택했다. 어느덧 저마다 가족을 이룬 다른 세 자녀들은 어머니에게 다소 소홀했다. 집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드물었고 어쩌다 대화를 나누어도 별다른 화젯거리를 찾지 못했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동안 부인에게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허전함이 덮여 왔다. 여섯 식구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던 예전의 바쁜 일상과는 극히 대조적인 나날이었다. 나는 그녀가 예전에 즐겨했다는 자수나 손뜨개질을 다시 해 보라고 권했지만 일종의 ‘열정의 부재’가 어떤 활동으로부터도 환자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뭐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몹시 동요된 상태로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눈물범벅이 되어 온 몸을 떨면서 내게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는데 세 자녀들이 ‘우연히도’ 모두 휴가 중이었다는 것이다. 자녀들 중 큰아들은 어머니의 생일 때문에 휴가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다. 딸 하나는 꽃 배달 서비스를 통해 간단하고 형식적인 축하의 말과 함께 꽃다발 하나를 보냈다. 셋째 아이는 생일을 아예 잊어버렸다. 부인은 혹시 누군가 축하 카드라도 보내지 않았나 싶어 편지함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죽은 딸 앞으로 온 편지를 하나 발견했다. 딸이 사망한 병원으로부터 온 우편물이었다.
부인은 이를 ‘운명의 장난’이라 여기고 채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충격에 휩싸였다. 하필이면 자신의 생일에 그 끔찍한 불행을 떠올리게 된 것이 그녀에게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로만 여겨졌다. 그녀는 온 세상이 자신을 배신한 것만 같다며 흐느꼈다.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환자를 달래며 땀에 젖은 환자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들고 열어 보았다. 흔한 설문조사를 요청하는 편지였다. 복잡한 쇄골 골절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다는 어떤 의대생이 보낸 것이었다. 병원 측으로부터 쇄골 골절 환자의 명단을 받아 우편물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이 부인의 딸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부상의 후유증이 어땠는지 등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해줄 것을 발신인에게 청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부인에게 편지의 내용을 전달한 뒤, 그녀쟀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약간 모험적인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일단 이 학생에게 상황을 설명한 답신을 보내 주시고, 따님의 이름이 적힌 봉투는 소중히 간직해두세요. 이 편지가 부인의 생일에 맞추어 도착했다는 게 오히려 놀랍지 않나요? 하늘나라에서 보내는 따님의 생일 축하 인사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살아 있는 세 자녀분은 각자의 일로 바빠서 어머니의 생일조차 챙겨 드릴 여유가 없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어머님의 품을 떠난 막내따님은 이처럼 놀라운 우연을 통해 오늘 어머니의 마음에 생생하게 되돌아왔지요. 기적과도 같이 말입니다. 부인이 말씀하신 ‘운명’의 의도는 의대생의 실수를 통해 부인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었어요. 아니고말고요. 오히려 기쁨을 주려는 것이었지요. 부인의 생일을 맞아, 고인이 되신 따님의 기억을 부인에게 되돌려줌으로써 말입니다. 마치 이 편지가 오늘 도착하도록 따님이 하늘에서 조종하기라도 한 것처럼…….”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몇 분이 흘러갔다. 이윽고 부인은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손가방에 넣고 일어나서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의심할 여지없이 부인은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고통은 더 이상 무의미하고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 보다 고아하고 의미 있는 세계와 연결된 존재였다. 온 세상이 그녀를 배신했다는 생각은 모녀간의 사랑이라는 상징에 의해 완화되었다. 이처럼 사랑은 고인의 무덤을 넘어 영원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pp.257-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