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화가 오원 장승업의 생애를 연구하는 나는 우여곡절 끝에 장승업의 손자를 만난다. 장승업의 손자라는 자는 토굴에 몸을 의탁한 광인狂人이었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그자로부터 장승업의 솔직한 면모와 숨겨진 일화 등 매우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된다.
황해도 안악땅, 한 저잣거리의 국밥집 처마 밑. 밥동냥을 하던 거지 아이(장승업)를 불쌍히 여긴 이진사(이용후)는 아이에게 국밥을 한 그릇 사 먹이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한양에 가서 머슴을 살겠다며 막무가내로 이진사를 따라나선다. 한양에 당도하자 장승업은 이진사와 헤어져 머슴살 집을 찾아 정처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진사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뜬 청빈한 선비로서 서학(천주학)을 섬기고 있었으며, 일찍이 진사시에까지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진사는 우연히 홍생원(홍경무)을 만나 홍생원의 단골 기방인 '청계옥'으로 안내된다. 이진사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승업을 발견한다. 그는 그곳 기생 연홍에게 승업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그러자 연홍은 그런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진사를 흠모하게 된다.
승업의 장래를 염려한 이진사는 변주부에게 부탁하여 승업은 사동으로 약전에 기거하게 된다. 변주부는 승업의 천부적인 소질을 발견하고는 승업이 그림 습작에 전념하도록 배려한다. 한편, 연홍은 이진사에게 천주교에 입교할 뜻을 비추고, 이진사는 흔쾌히 그 뜻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승업을 가르치고 건사하기에는 벅차다고 생각한 변주부는 승업을 중추원부사 이응헌에게 맡긴다. 승업은 그곳에서 그림을 갈고 닦는다. 한편 승업은 이응헌의 여식 운옥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이진사와 변주부는 더욱 뛰어난 화가에게 승업을 맡기는 것이 좋다는 데 뜻을 모으고, 화원 유숙에게 승업을 소개하여 사사토록 한다.
승업이 유숙에게 사사받은 지도 3년이 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아홉의 청년이었는데, 그가 연모하던 운옥이 병으로 죽자 승업은 곡기를 끊고 붓을 꺾는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승업은 이진사를 찾아간다. 그런 승업을 본 이진사는 그림에만 정진할 것을 이른다. 굳은 다짐으로 고향에 다녀온 후 승업은 다시 유숙 밑에서 그림을 배우게 되고, 유숙의 천거로 화공이 된 승업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역사의 하나인 근정전의 병풍 그림을 그리게 된다.
한편, 천주교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연홍이 이진사를 연모함에 격노한 홍생원은 연홍이 천주교도임을 포도청에 밀고하여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연홍의 죽음 이후 그림을 다시 작파하고 폭음을 일삼던 승업은 여러 화우들과 교유하면서 정진한다. 그러던 차에 유숙은 승업을 당대 화단의 거목인 정학교 밑에서 침식토록 한다. 이때 승업의 평생 은인이었던 이진사도 노쇠하여 죽고 만다. 승업은 깊고 깊은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승업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그림에 매진한다. 술과 더불어 신필神筆을 휘두르는 그의 화명畵名은 이미 장안에 자자했다. 그와 교유하고자 당대의 많은 청년 화가들이 승업을 찾는다. 그는 술과 화우와 그림을 벗삼는다. 승업은 자신의 그림에 격을 높여야 한다는 결심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승업은 화우 양기훈을 따라 경기 광주땅 사옹원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엄한 규율 아래 돌아가는 사옹원은, 술이 거나하게 올라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규율을 어기고 술을 탐하던 승업은 술 문제로 갖가지 분란을 일으킨다. 그러던 중 기생 자운과 살을 섞게 된 승업은 모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어 작업에 몰두한다. 두 사람은 살림을 차리고 자운은 승업을 서방으로 모신다. 그러나 자운의 몸에 애가 들어서자 승업은 기겁을 해서 사옹원을 떠난다.
한양으로 돌아온 승업은 기생 진향과 살림을 차리고 그림에 매달린다. 그러나 자운이 제 새끼를 안고 찾아오자, 승업은 자운과 진향을 모두 떨치고 동가식 서가숙으로 한세월을 지낸다.
승업은 형조판서 민영환을 통해 상감의 병풍 그림을 그리라는 명을 받고 입궐한다. 그러나 술 생각만 간절한 그는 붓을 잡지 못하고 궁궐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마침내 그는 야음을 틈타 궐 밖으로 빠져나와 술을 마시는 재미에 맛을 들인다. 그러나 기어코 꼬리가 잡힌 승업은 기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승업은 민영환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승업은 민영환의 집에서 기거하며 상감의 병풍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결국 어명을 받들어 그린 열 폭짜리 병풍 그림은 일곱 점에 그친 채, 술과 자유를 찾아 야반도주하고 만다.
고향땅 안악에 당도한 승업은 부모 무덤을 새로 만든 후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내금강 장안사에 당도하여 주지 스님에게 숙식을 청한 승업은 이튿날부터 금강산의 절경에 취한다. 금강산 절경 앞에서 전율을 느낀 그는 자연의 오묘한 생성을 그림으로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지금껏 자신이 그린 산수화는 모두 허망한 것임을 느낀다.
오원 장승업, 그의 그림을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오원은 문전 걸식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하게 살다가 붓 한 자루로 왕실의 벼슬까지 받았으나, 그 숨막히는 자리를 스스로 포기, 끝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기인이다. 한국 근대 회화의 터를 닦은 오원의 라이프 스토리를 통해, '신필神筆'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시대의 과오까지 함께 읽어주기 바란다.
--― 이영희(소설가)
'신이 내린 화가'라는 격찬을 들었던 조선 후기 화가 오원 장승업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광기와도 같은 예술혼이 작가 민병삼에 의해 치밀한 구성으로 재조명되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는 달리 불학 무식한 천민 출신으로 오직 장인 정신 하나로 그림을 그렸던 장승업의 삶이 재조명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 조진영(동양화가, 상명대 교수)
1843년∼1897년.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이며 조선 후기 화원畵員을 지냈다. 기명절지器皿折枝,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에 능하며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화단의 거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해도 대원 출생으로 추측되는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문전 걸식 하다가 한양으로 와 기생집과 약전 등에서 심부름을 하며 연명하는 가운데, 우연히 그림을 모사하면서 스승을 만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자나 겨우 쓸 만큼 일자 무식이나 신이 내린 화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고,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술과 여자가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