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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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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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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42쪽 | 202g | 149*200*10mm
ISBN13 9788939230453
ISBN10 893923045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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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찰나
주머니에 두 손 넣고
강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사진 좀 찍어 주세요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 돌려
목을 빼어 친구를 부른다

그 사이 성급한 꽃잎은
몇 프레임을 이미 지나간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말을 건다
―젊은 선글라스 씨 사진 좀 찍어 주세요
그는 오래전에 본 천연색 꽃이 떠오르는지
잡고 있던 지팡이로 셔터를 누른다
흑백의 답을 꽃잎에게 전한다

그 사이 벚꽃은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한다

맑은 눈빛의 아이가 프레임 속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찍으려는 거죠
―다만 꽃잎 떨어진 벚나무 한 그루 있는데
―이걸 사진 찍으라는 건가요

주머니 속, 없는 손이 친구의 손을 부르고
선글라스 씨가 지팡이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이가 자신의 맑은 눈을 빌리게 하며
꽃잎은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나

순간의 시간을 놓아 버린 벚나무 가지가 앙상하다
---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중에서


(…)
구석은 굴러다니는 소리를 밟으며 자랍니다. 밀리고 밀리다 구석이 되는 것들은 온몸이 발이 되기도 합니다. 구석을 깨고 나온 것들은 손이 없고 하얗게 터지는 물살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피어오르는 구름은 푹신하고 차갑습니다

(…)
모퉁이가 없어지면 이쪽과 저쪽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구석들은 평행선 위에 모두 서 있겠지요. 구석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 어둠이 몰려나오는 곳입니다. 구석은 하품이 나오고 눈이 감겨집니다. 밤에 안겨 새근거리는 잠이 됩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구석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 「구석이라는 곳」 중에서


여름이면 거리로 나와 활보하지
감싸던 것들을 다 던져 버린 맨살
걸을 때마다 땅 한번 치고 올라와 부딪치는 슬리퍼

탁 탁 탁
아, 천지간

휘파람은 한때 아름다운 말을 끌고 다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지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 끈 하나 걸려 있지

탁 탁 탁
바닥과 바닥 사이
산이 구름이 빌딩이 보이고 무수한 뒤꿈치들이 있지
저 뒤꿈치의 힘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지

역방향의 계절에는 역방향의 걸음이 참 어울리지
기우뚱거린 잎들이 펄럭이며 떨어질 때
걸어온 지평선이 하늘과 닿았지
구름은 땅 밑으로 스며들고 자전거는 넘어지지

탁 탁 탁
뒷걸음으로 걷는 신발이 있으면 좋겠어
뒤꿈치를 악기라 부르면 좋겠어

순간들이 스쳐지나갈 때 노래의 뒤꿈치는 닳아 가지
잘 벗겨지는 거리와 거리 사이

탁 탁 탁
아, 천지간 사이의 시간들
--- 「뒤꿈치」 중에서


집이야말로 우후죽순의 박물관이다.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연다. 날카롭고 뾰족해지는 식사. 집 안 어디를 찾아봐도 채소는 보이지 않는다. 묽은 육즙의 고기들을 꺼내 들고 뜯어 먹기 시작한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핏물, 갑자기 가슴이 간지럽더니 젖꼭지가 여섯 개나 생긴다. 창밖 달을 바라보며 긴 소리를 지른다.

피를 먹는 밤, 크고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먹는 밤, 입 안이 아프다. 아픔으로 배를 채우는 밤, 그런 날이면 이빨이 우지끈거린다. 치통이다. 눈이 번쩍 떠진다. 입 안에 맹수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 「치통이 오는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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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종은 한때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펄펄 뛰었으리/큰 입으로 덥석 먹잇감을 물기도 했으리/바위를 붙잡고 버텨야 하는 시간을 견뎠으리.”(「망둥이 떼」 부분) 이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시다. 아주 역동적이고 감각적이다. 시어가 근육질이라 고 해야 할까, 힘이 철철 넘쳐흐른다.
시인은 삶의 현장을 시의 공간으로 삼기를 즐겨하지만 때로는 밤하늘의 별들을 시의 화폭에 그려 넣기도 한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간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한명원 시에서의 천상은 천국도 아니고 ‘영원성’의 무한한 공간도 아니다. 뚫린 지붕으로 보이는 현실의 별이다.

물리학과 천체과학이 세상의 모든 신비한 자연현상들을 숫자로 설명하고 있는 이 시대에 시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펜을 들어 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규정하고 명명하는 것이다. 그 소임을 다하려고 하는 한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이 다시 나타나면 새로운 공화국에서 제일 필요한 인물이 시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한명원이 바로 그런 시인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산통이 시작되고 뼈들이 쏟아지” (「육필」)고 있으니 말이다.
-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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