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운 세월 노동문제와 관련된 분야에서만 살아왔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면 ‘노동운동’이라 불리는 것이 내가 해온 일일 텐데, 노동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서 만나는 여인들이 있다(굳이 ‘여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언젠가 어떤 이가 쓴 글에서 ‘여인[女人]이라는 단어에만 사람 인[人] 자를 쓴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을 얼핏 본 적이 있어서다).
내가 하는 일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만나거나 또는 함께 일하며 아껴온 후배가 어느날 문득 여성으로 다가서는 느낌!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내가 목석이라는 뜻일 게다.
내 안해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버스 안에서 한 중년 사내를 보았는데 숨이 탁 막히도록 좋은 느낌을 주더란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우리 남편도 저렇게 나이를 먹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얼버무렸지만, 한편으로는 ‘남편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는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대강 이렇게 합의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 가슴 한구석에 한 줌 그리움 정도 간직하고 사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겠어. 그러나, 그 크기가 한 줌을 넘으면… 그때는 너 죽고 나 죽고, 완전히 사생결단하는 거야.”
이 책은 그렇게 만난 ‘참하다’는 느낌을 주는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읽다 보면 ‘사생결단할 일’은 없으려고 노력하는 갸륵함이 곳곳에 엿보이는 것 같아 스스로 웃음 짓는다.
1부에서는 노동문제와 관련된 공간에서 만난 여성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묶었고, 2부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만난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고마운 안해에 관한 추억들을 추렸다.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여성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내 내공이 한참 모자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서러움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보고 느껴서 알고 있는 바, 우리 사회 여인들은 ‘노동자’라는 서러움에 ‘여성’이라는 불리함이 더해져 곱빼기로 힘들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더 보태고 싶은 말이나 꼭 해야 했던 이야기, 기쁨과 슬픔의 사연이 더 많이 있지만, 부질없이 다음을 기약한다.
여성 노동자들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남성 노동자들이나 과거의 척박했던 현실을 돌아보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며, 서로 더 많이 사랑하고 배려해서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바란다. 혹시라도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함께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더욱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곧 5월. 세월은 흘러도 다시 처음처럼 뜨거워질 사람들에게, 그동안 만난 여인들에게, 그리고 미처 말하지 못했던, 훨씬 더 많은 한결같은 그대에게 이 책을 바친다.
(머리말 중에서)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어린이집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혼자 겪으면 너무 힘에 부치니까 서로 도우며 함께하자고 모인 것, 그것이 바로 교사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옳은 일을 서로 도우며 함께 하자고 모인 것, 그것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를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의 신성한 단결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결코 노동자에게만 유익한 집단이기주의적 조직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문제점을 고쳐 더 좋은 사회로 만들어 가는 올바를 수단을 제공한다.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200년이 넘는 역사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님 중에서)
아, 나는 그 예금통장을 받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고 자라는 동안 그 꿈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던 그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얼마나 어렵게 공부했는지, 그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 통장을 받을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자 그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내게 주었다.
동료가 모여 있는 장소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황골고개 긴 언덕을 오를 무렵, 마치 은가루처럼 반짝거리는 조각들이 나풀나풀 떨어지다가 옷에 닿으면 아무 흔적도 없이 녹았다. 언뜻 보면 그냥 지나칠 만큼 작은 눈송이였다. 매번 첫눈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3년이 지난 봄날, 그 친구는 나의 소중한 안해가 되었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