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렇게 죽고 싶은가?'
'난 오랫동안 죽음과 함께 살아온 셈이야.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일세.'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팬쇼는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문 저편에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내게서 생명이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넌 바보야.' 나는 다른 말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넌 바보야. 죽어 마땅한 놈이라구.'
다음 순간 나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으메 휘말린 나는 어린애처럼 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정신없이 문을 두드려 댔다. 금방이라고 울 것 같았다.
'이젠 가는 게 좋겠군.' 팬쇼가 말했다. '이렇게 일을 질질 끌 필요가 없잖나.'
'난 가고 싶지 않아. 아직 할 얘기가 있다구.'
'아니 그렇지 않네. 얘기는 다 끝났어. 공책을 가지고 뉴욕으로 돌아가게. 그게 내가 부탁하는 것 모두일세.'
--- p. 422-423
우리는 말 속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대체시킨다. 이것은 기만이다. 우리는 아마 혼자로도 존재할 것이고 자기가 누군지 어렴풋이 알 때도 있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확신라지 못하고 만다. 삶이 진행될수록 자신은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스스로의 모순됨을 알게 될 뿐이다. 아무도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 건너갈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 p.334
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당겨져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또, 이 세상과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한없이 다정한 마음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와서는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용기있게 빨간 공책의 마지막과 대면해 보기로 했다. 그는 빛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혹시 펜 없이 마음 속에 글을 적을 수는 없을지, 글을 쓰는 대신 어둠을 자신의 음성으로 가득 채우고 허공과 벽에, 이 도시에 말을 할 수는 없을지 생각해 보았다. 빨간 공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빨간 공책에 더 이상 쓸 자리가 없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