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메일은 어떻게 받고 어떻게 보내는 것일까. 시험 삼아 E메일 한 통을 써 보았지만 주소를 어디에다 써야 하는 것인지, 키보드 어디에 '@'표시가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무작정 보내고 나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에러 메시지가 뜨거나 다음날 편지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튼튼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한 손을 마우스에 접착시킨 채로,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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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이미지를 위해 점잖으면서도 무겁지 않은 라이트 그레이 톤 치마정장을 샀다. 마침 속에 받쳐입는 붉은 색 폴라와도 잘 어울렸다. 구두는 사무실에 있는 비상용 신발을 신으면 될 것 같았다. 옷차림 변신 준비 완료, 일하다 말고 들어서는 나를 본 직원들이 야유와 탄성을 함께 보냈다. 평소 나의 화장은 5분이면 뚝딱 끝이 나지만 화장은 어른이 하는 재미난 놀이 같다. 이것 저것 얼굴에 찍어 바르다 보면 어느새 작품 하나가 탄생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자기 만족을 연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듯 봉오리를 터뜨리기 직전의 맨 얼굴위에 나만의 고유 이미지를 표출하는 것, 튀는 칼라가 등장하는 립스틱을 바를 순서가 되면 내손은 사르르 떨린다. 독특한 긴장감이 나를 전율시킨다. 이처럼 화장은 자기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액세서리 특히 귀걸이는 내게 외출 준비의 마침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향수로 외출 차림을 끝내는데 내게는 귀걸이가 향수를 대신한다. 귀걸이를 해야 외출 준비에 스탠바이 큐 사인이 떨어진다. 내 사무실 책상 아래는 항상 구두가 두세 켤레 있다. 대부분 과감하지 않은 베이직 스타일로 색깔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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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들은 정의롭다. 우리는 부정을 할 줄 모른다. 남자들이 몇 억씩 받아 챙기고 꿀꺽 까먹는 동안에, 여자들은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지나 해 일어났던 화성 씨랜드 화재 참사는 나 역시 아이를 기르는 부모로서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때 남자들이 몇 억씩 주고 받는 동안, 단 한 명의 여성이 돈을 거절하고 분개할 줄 알았다. 그녀는 업무 수첩에 썼다. '굶어 죽어도 그런 돈은 받고 싶지 않다!'
여자들의 이런 모습이 남자들에겐 융통성이 없고 소갈머리가 좁은 것으로 비춰지는 모양이지만, 여자들마저 이러길 포기한다면, 정말로 이 세상은 누가 구하나?
이렇게 우리 한국 여성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사이버 세상은 너무나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그곳에서 우리 여자들이 모여 좀더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고, 더 많은 여성이 힘을 합칠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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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란 말이 맞다면, 인터넷은 인생과 같다. 그것도 내가 바라왔던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인생이다. 클릭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그 인연을 받아들이냐, 마느냐의 결단이다. 클릭을 하는 순간, 나는 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P77
이때 요구되는 노하우가 사람 조육법이다. 각자의 스페셜티(Specialty)를 미리 파악해 두었다가 그에게 가장 잘 맞을 일을 앵겨 버린다. 내가 잡아 둔 기본 컨셉에 구획을 정리해서 불도저처럼 밀어 버린다. 사이사이 나 역시 떡잎을 보인 아이디어가 펄펄 뛰어다닐 수 있도록 영양가 될 생각을 해 둔다. 그렇게 서로 조율하다 보니,70점까지 올라온 아이디어에 내 생각을 플러스하면 떡잎에 열매가 송골송골 맺힌다.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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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우선 엄살 피우기를 그만 두는 것이다. 나처럼 인터넷을 조금 하는 여자를 두고, '대단해!' 라고 감탄하면 안 된다. 그보다는, '그래, 저 여자도 인터넷을 한단 말이지? 그럼 나라고 못할 것 없겠네!'라고 생각해야 옳다. --- p. 33
'엄마는 널 위해 일하고 있단다. 이 다음에 네가 직장생활을 할 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거름을 주고 있는 거야. 엄마가 직장생활에서 겪었던 여성차별이나 불이익을 다원이에게 물려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꿋꿋하게 일할 거야. 너를 희생시키는 감이 없진 않지만, 너 같은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을 위해 사회에서 노력하는 게 나의 의무라고 믿는단다. 그런 엄마를 이해해 주렴.' ---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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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고에 미쳐 살던 프로우먼이었다. 21세기가 막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마치 때가 되면 허물을 벗는 뱀처럼 나는 광고인의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이곳으로 왔다. 바로 ‘On’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터넷이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나의 변신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려 15년을 광고만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인터넷 회사를 이끈다는 거지? 그냥 제자리에만 있어도 앞날이 창창한데, 저 여자는 왜 새로운 일을 저질러 고생을 사서 하려는 걸까?……
그렇다. 내가 아무런 회의없이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여성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여자고, 지구의 반도 여자다. 하지만 지구 여성의 70%가 ‘On’으로부터의 초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로 오면 이 비율은 더 커져서 80% 가까운 여성들이 인터넷을 모르고, 아프리카로 가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여성의 비율이 1%도 안 된다. 일부 여성들은 모르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일부 남성들은 여자가 알기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On의 세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며 알면 알수록 신이 나고 즐거웠다. 이 땅에 여성처럼 할 말 많은 종족이, 그러면서도 말할 곳이 없는 종족이 또 있을까. 하소연이든 넋두리든, 혹은 슬픔이든 기쁨이든 간에, 그것이 수다가 되건 토론이 되건 간에, 이곳에는 귀담아 듣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