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을 우리 가족들이 다 반대를 합니다. 아니 가족들이 아니라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를 합니다.”
나는 내가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급소를 찔린 것 같았다. 나는 충격을 감추고 너스레를 떨면서 한마디했다.
“그거야 각자의 자유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의 부모님께서 저를 반대할만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것을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자 그녀는 잠시 주저하였다. 그럴수록 반대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아무 실수도 하지 않았다. 가령 임신을 시킨 것도 아니고, 임신은커녕 손목조차도 잡아보지 않은 사이인데, 왜 그녀의 부모님이 나를 반대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마침내 그녀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하륜 선생님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저는 총장님의 승용차 위로 올라간 적이 없고, 차 지붕 위를 걸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평소에 제가 가던 대로 도서관을 향해서 직진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때 무슨 물체가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것이 총장님 승용차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 물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냥 평소처럼 직진했을 뿐입니다.”
총장의 승용차 위를 어느 학생이 걸어갔다는 사실은 즉각 총장에게 보고가 되었다. 총장도 너무나 놀라서 교직원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고 했다.
“총장님, 그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래? 왜 남의 차 위를 걸어갔다는 거야?”
“이처럼 대부분 사람은 자기 편리하게 보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며, 결국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합니다. 이런 바탕에는 얼추 자기 이익적 계산이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도둑이 보석을 훔칠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도둑처럼 판단하고, 도둑처럼 행동합니다. 도둑이 보석을 훔칠 때 사람이 보여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도둑은 보석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고, 도둑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보석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와 ‘보석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느냐’가 운명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도 보석상만 털지 않아 도둑이 아닐지 몰라도 사실은 도둑입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보석상을 턴도둑보다 더 상습적인 교활하고 지능적인 도둑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 적이 다반사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보고 싶어 하던 것을 보는 순간, 내 눈에도 역시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유일하게 함석헌 선생님이 군부세력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장준하 선생이 만드는 「월간 사상계」에 “박정희 장군은 이제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요지의 핵폭탄급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서는 ‘군인은 본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민중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지만, 이를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가 이런 용기 있는 글을 실어줄 용기 있는 지면도 없었다.
실력 없는 선생에게 엉터리로 배운 사람에게는 제대로 가르치기가 아주 힘이 들뿐 아니라 대부분 불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깨끗한 도화지에 개발새발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면 나중에는 그림을 지울 수도 없고, 또 그 위에 새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잘 그리게 가르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뭘 제대로 배우려면 어설프게 개발새발 그려오지 말고, 깨끗한 백지로 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합니까?”
듣는 자세 일등! 이것은 얼핏 보면 아주 별것 아닌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것이 만만치 않은 것이란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결론이 났다. 내가 명동 모임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태도에서 일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당장 도전해야 할 목표이다.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잔소리 그만하고 새로운 인사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앞으로 국어 시간에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장이 일어서서 ‘차렷! 경례!’ 하는 군대식 구령을 집어치우고 이렇게 하기 바랍니다.”
반장의 구령을 집어치운다는 대목부터 학생들에게 또다시 충격을 준 것이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잘 말해주었다.
“새로운 인사를 하는데 반장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인사를 할 때, 종전처럼 군대식 구령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장의 구령에 따라서 인사를 할 것이 아니라 학생 각자가 자발적으로 하면 됩니다. 자발적으로 인사하는데 무슨 얼어 죽을 군대식 구령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국어 시간에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여러분은 각자 앉았든지 섰든지 간에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반갑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도 ‘반갑습니다’라고 답례를 하겠습니다. 이것이 수업 전에 하는 새로운 인사법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