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악보를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 음표 하나하나 공들여 치지도 않는다. 음표들을 은근슬쩍 건너뛰기도 하고, 뻣뻣한 자세로 수줍은 듯 연주한다. 아니, 연주하지 않음으로써 연주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런 연주 스타일은 그가 말했던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 자체이며, 시간성과 육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10쪽)
공식석상에서 드러내는 음악 취향과 혼자 있을 때 좋아하는 음악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바그너 음악의 현대성에 관해 썼던 니체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들으며 울먹였고, 사르트르는 크세나키스와 슈톡하우젠에 관한 글을 썼지만 쇼팽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리고 바르트가 가장 아꼈던 작곡가는 다름 아닌 슈만이었다. 이 세 명은 당대의 가장 현대적인 음악을 논했지만 정작 이들이 사랑했던 음악은 피아노가 악기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이었다.(12쪽)
당시 사르트르에게 음악은 종교 활동이고 사교 활동이었다. 연주회, 음악 감상, 충만한 영성 그리고 슈바이처 가문 남자들의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 음악과 관련돼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든 것은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운 것, 즉 휴머니즘과 부르주아지의 전형이었다. 일요일 예배와 오르간 소리, 루터교의 찬송가, 토카타는 사르트르와 음악 사이를 틀어지게 했다.(46쪽)
니체는 마음속에 상상의 지형도를 그렸다. 이 지형도에서 쇼팽은 이탈리아 쪽에 위치한다. 쇼팽 의 음악에는 이탈리아 특유의 경쾌함과 단순함,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북쪽의 독일이 아닌 남쪽 지중해를, 안개가 짙게 깔린 날 대신 건조하고 화창한 날을 떠올리게 한다. 쇼팽은 라파엘로, 레오파르디와 같은 고향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슈만보다는 로시니, 벨리니에 더 가까웠다.(91쪽)
피아노를 처음 접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만의 해석이 가미된 연주를 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연주자와 피아노는 오랜 시간 함께한다. 그러므로 피아노 앞에 앉은 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존재 전체를 논하는 것과 같다. 피아노는 리듬이며 지속이다.(147쪽)
바르트는 할머니의 낡은 악보를 펼쳤다. 음표 아래에는 손가락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숫자들은 이전 세대 연주자들이 기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남긴 기호이며 연습의 흔적이다. 바르트는 그 손가락 번호대로 자신의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162쪽)
슈만을 어떻게 듣냐고요? 나는 슈만을 연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듣습니다. 그러면 또 당신은 슈만 을 어떻게 사랑하냐고 묻겠지요. 글쎄요. 그 질문에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나의 어떤 부분, 정확히 그 부분이 내가 슈만을 사랑하는 이유니까요.(193쪽)
사람이 악기와 나누는 친밀감은 연인의 그것과 닮았다. 피아니스트는 자기 피아노가 어떻게 쳤을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약점을 감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의 피아노만 낼 수 있는 저음의 비밀과 해머의 부드러운 정도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어떤 건반은 타건된 뒤에도 다시 튕겨 올라오지 않고 눌린 채로 있어서 실수를 유발하곤 하는데, 피아니스트는 말썽을 부리는 건반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피아니스트는 평생을 함께한 친구의 누렇게 바랜 상아색 건반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피아노를 향한 사랑은 이처럼 소리의 색채와 나무의 온기에 빚지고 있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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