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콧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쓰고 동물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땀을 닦으려고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에도 동물 그림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매우 궁금했는데 가방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십니다. 모두 동물에 관한 책들입니다. 일본에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 온 코끼리 사쿠라 이야기, 일본과 한국에서 지금은 모두 보기 힘들어진 황새 이야기, 펭귄 이야기 같은 어린이책인데 알고 보니 모두 그분이 직접 쓰신 책이었습니다.
이 분, 어릴 때부터 동물을 사랑해서 사육사가 되고 싶었던, 그러나 전혀 상관없게도 지금 세탁소를 하고 계시는, 작가 선생님이랍니다. 낮에는 일본 교토의 한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고, 휴일이면 동물들을 보러 다니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동물에 관한 책을 쓰신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애틋하고, 책이 전하는 메시지도 따뜻해서 우리 도서관에서는 이 분의 책이 늘 엄마와 아이들에게 권하고픈 추천 도서 코너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궁금했습니다. 이 분은 왜 본인이 사랑하는 한 가지 직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이렇게 복잡한 삶을 살게 되셨을까요? 이번에 ‘세탁소 아저씨의 꿈’ 이라는 그림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재일동포입니다. 일본 식민지 시절 할아버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조국 광복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땅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지만 일본인 되기를 거부하고 지금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 3세입니다. 식민시대는 35년으로 짧았지만, 식민의 잔재는 깊어 광복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해결하지 못한 역사의 과제들이 많이 놓여 있습니다. 그 중심에 일본에 살고 있는 수십 만 명 재일동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조선학교를 세우고, 우리말을 배우고, 우리 역사를 배우며 민족의 뿌리를 지켜내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 광복 이후에도 이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학교를 학교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 때는 다른 일본 친구들처럼 일본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잘 어울리지 못했고 늘 혼자였다가 아이는 동물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그리워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는 차별과 무시가 없는 조선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고 나니 일본 정부에서 학력을 인정해 주지 않아 그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력이 없어서 정부 공인 자격시험을 칠 수 없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사육사가 되지 못했고, 생업을 위해 부친이 운영하던 세탁소를 물려받았지만 중졸의 학력이 필요한 세탁사 시험도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자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작가라는 직업은 시험을 치고 자격증을 받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들에 대한 책을 펴내고 한국에 있는 우리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탁소 아저씨의 꿈은 이분의 삶에 감동받은 한국의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처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아이들의 꿈에 대한 책입니다. 정대세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 요리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내 요리를 먹고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아이, 야무지게도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바라며 전쟁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꿈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꿈을 꾸는 일이 쉽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꿈을 꾸는 일조차 절망인 현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꿈을 꾸기보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차별과 무시, 좌절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꿈이라도 꾸지 않고서는 단 하루를 견딜 수 없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꿈꾸는 힘이야말로 자신의 미래를 활짝 여는 힘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육사가 되고 싶었으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작가가 된 책의 주인공은 바로 이렇게 꿈을 꾸는 힘이 있었기에 자신 앞에 놓인 엄혹한 현실의 벽을 딛고 우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시대와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밟힌 가녀린 풀들처럼 꿈과 일상을 짓밟히고도 굳세게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들이 되어준 재일동포, 우리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집니다. 함께 응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꿈을.
백창화 (숲속작은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