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참사가 났다. 어른의 탐욕과 무책임으로 많은 어린 학생이 숨진 참혹한 해양사고였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다이빙 벨 논란이다. 다이빙 벨은 해저탐사에서 가장 초보적인 첨단 장비였으며,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과학장비이다. 과학장비가 정략적 논란이 되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특히 실종자 수색과정에서 장난감 수준의 무인잠수로봇(ROV)이 외국에서 공수되는 장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미 우리의 해양탐사 수준은 이런 장난감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적됐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문제는 기존 과학기술과 장비, 인력을 적시에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 빨리 에어포켓을 포기한 것이다. 외국의 해양참사에서 상당기간 에어포켓에서 생존하다 구조된 사례가 많다. 해저탐사 전문가들은 일제강점기인 70~80년 전 침몰한 배에도 지금까지 에어포켓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70년 전 공기를 지금 마시는 것이다.
필자는 2000년 해양수산부를 출입하던 신문기자였다. 바다 관계자들로부터 평소에 접할 수 없던 바다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그 때 접한 바다는 무궁무진한 과학과 신비의 세계였다. 이 책은 당시 직접 취재한 수첩을 옮기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계속 보완해 완성한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불과 이틀간의 전투로 제2, 3태평양함대는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다. 모두 38척의 전함 가운데 19척이 격침됐으며 7척이 일본에 나포됐다.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배는 3척에 불과했다. 러시아 해군 5,000여 명이 전사하고,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의 피해는 어뢰정 3척이 침몰되고 1백여 명의 전사자만 발생했을 뿐이다.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러시아의 완패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돈스코이호만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함대 사령관은 물론, 부사령관까지 모두 항복하거나 도주했지만 돈스코이호만 끝까지 항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를 일본 해군에게 줄 수 없다며 스스로 침몰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 도고제독도 부상을 입고 체포된 로제스크벤스키 제독을 문병하며 돈스코이호의 영웅적인 항전을 높이 치하했다. 러시아 해군은 이 전투에서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전함으로 돈스코이호를 기리고 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 대해서 개별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패배 내지 항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포츠머드에서 맺은 조약이란 항복문서가 아니라 전쟁 당사국이 종전에 합의한 문서라는 입장이다. 사실 러시아는 통상 알려진 대로 일본에게 패전에 따른 보상금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전투는 만주에서 교착된 상태였고, 연해주와 대한제국 함경도 접경지역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서 바랴크호는 자침, 코레이츠 포함은 자폭, 돈스코이호 역시 용감히 싸우다 자침했다는 것이 항복이 아니라는 근거로 든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로 돈스코이호가 활용되는 것이다. 러시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돈스코이호 레베데프 함장의 묘가 있는 일본 나가사키를 찾아 헌화할 정도였다. 현재 돈스코이호는 러시아 최대, 세계 최대 핵잠수함 이름으로 화려하게 부활해 있다.
돈스코이호는 제2, 제3태평양함대 총사령관 로제스크벤스키 제독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유일한 순양함이다. 돈스코이호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스스로 침몰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스코이호에 끝까지 일본군에게 내어줄 수 없던 그 무엇이 있던 것 아닐까. 돈스코이호에 대한 드라마틱한 미스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장 포염, 1905년 5월 29일] 중에서
동아건설이 돈스코이호 탐사에 뛰어든 배경에는 이 탐사의 경우 과거 탐사 기초자료가 있기 때문에 조금만 더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게다가 동아건설은 과거 탐사를 추진했던 도진실업과 달리 항만건설 등으로 축적한 해양개발에 대한 노하우와 기초적인 장비를 대부분 보유한 상태였다. 따라서 전문적인 탐사프로젝트는 해양연구소가 맡고, 기본적인 해양 플랜트 작업은 충분히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동아건설은 내부 검토 결과 돈스코이호 탐사내용을 다큐멘터리로 영상화하면 별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돈스코이호가 발견되면 정부를 통해 이를 인양, 혹은 관광자원화 하기 위한 해상기지를 울릉도에 세우는 등 새로운 해상프로젝트도 수주할 수 있었다. 이는 침체된 국내 건설경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활로였다. 탐사의 실질적인 효과는 물론, 이런 부대효과까지 감안하면 사업비 70억 원을 투자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다.
돈스코이호 탐사가 다시 거론된 또 다른 계기는 바로 당시 전국적 감동을 준 금 모으기 행사이다. 1998년 1월 9일 서울 주택은행 남대문 지점 앞에서 시작된 금 모으기 열풍은 불과 5일 만에 무려 20만 명이 25t의 금을 모았다. 초중고교에서는 금 모으기 운동 숙제까지 내줬고 금 모으기 행사는 일제시대 국난을 극복하는 제2의 국채보상운동으로 인식됐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비롯한 정치권은 물론, 경제계, 종교계까지 모두 금, 금, 금을 찾았다. 당시 금은 lMF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줄 구원자로, 아니 실업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로, 해체되는 가정을 지켜줄 보루로 등장했다. 금모으기는 암울한 시기, 국민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보여준 드라마였다. 국민들은 스스로에 감격했고, 힘을 얻었다.
1998년 서울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시절과 비슷했다. 1930년대 세계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 황금 찾기 열풍이 불었다. 당시 세계는 금태환 제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이 화폐발행을 늘리려면 상응하는 금을 확보해야 했다. 전 세계는 시신을 태우는 화장장에서 금이빨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운명 직전에 있는 부모 금이빨까지 뽑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정부는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에게 희망을 줄 드라마가 더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순양함 돈스코이호 탐사는 정부는 물론 관련 기관 모두에게 좋은 소재였다. 러시아 순양함 돈스코이호 인양 논의가 시작된 단초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정치·사회적으로 3가지 요소가 배경이 됐다. 첫 번째는 1998년 개봉된 영화 타이타닉이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과학자들의 해저탐사는 국책연구기관의 통폐합 및 구조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다. 두 번째는 해양플랜트 기업 동아건설의 워크아웃과 최원석 회장의 반전 기도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IMF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단결력을 세계에 과시한 금 모으기 행사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은 국민을 통합시키는 감동의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밖에 잘못된 한일어업협정 체결로 비난이 쏟아지던 해양수산부 당국자는 국면을 전환시킬 소재가 필요했다. 여기에 이 때 마침 일본 공영방송(NHK)이 돈스코이호 탐사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할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순양함 돈스코이호가 뭐길래 이들의 구미에 맞았을까. 100년전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군함에 도대체 뭐가 실려 있길래 정부와 굴지의 재벌은 물론, 우리나라 최고 해양연구소가 반전의 카드로 삼았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선 이웃 일본의 해저탐사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2장 삭풍, 1998년 1월 대한민국 서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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