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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향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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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향기 1

: 하나

이리리 | 가하 | 2014년 05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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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30쪽 | 526g | 148*200*30mm
ISBN13 9791156821083
ISBN10 1156821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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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이제 곧이다. 문효야, 미루, 아지, 유모. 내가 꼭 복수해줄게. 내 절대 잊지 않겠어.’
아사는 이를 악물고 오로지 남부여의 국경 성문만을 향해 달렸다.
‘지금 말을 달려 추적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재빠르게 판단한 융은 신라 땅에서 오직 자신만이 다룰 수 있는 무거운 쇠뇌를 들어 아사의 말을 겨눴다.
보통 활로는 닿지 않는 사정거리 밖이지만 워낙 강궁이라 화살은 아사가 탄 말의 엉덩이를 맞혔다. 엄청난 고통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면서 펄쩍 날뛰는 통에 떨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낙마를 모면한 아사는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고통 때문인지 말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융의 두 번째 화살이 말의 옆구리에 맞았다. 곧바로 날아온 세 번째 화살이 다시 엉덩이를 맞히자 기운을 잃은 말은 쓰러졌고 아사 역시 땅에 굴렀다.
아사는 땅에 어깨를 바로 부딪힌 충격에 온몸이 얼얼하고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나 치마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보이기 시작한 남부여의 국경 성문에선 망루에 선 병사가 무슨 낌새를 눈치 챘는지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 빨리 문을 열고 나를 구해줘. 난 남부여 영수 왕자의 약혼녀 아사 공주야. 남부여로 가야 해.’
그러나 야속하게도 성문이 열리는 소리보다 뒤쪽에서 신라군이 다가오는 소리가 더 빨랐다.
아사는 이를 악물고 달렸지만 말발굽 소리는 금방 가까워졌고 그리고 곧 누군가의 강한 팔에 채여 말로 끌어올려졌다.
“놔! 놓으란 말야! 난 남부여로 가야 해.”
강철같이 강한 팔을 가진 사내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아사의 몸부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부여의 망루에선 신라군이 아사를 채가는 것을 보고는 상대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성 주변에 경계하는 부산한 움직임만 있을 뿐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미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절망감에 발버둥 치던 아사는 자기 몸을 끌어안은 그의 손을 이빨로 꽉 깨물었다. 야속하게도 잠시 움찔한 것을 제외하고는 피가 나는데도 그의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화가 치민 아사는 사내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더러운 신라 놈! 왜 나를 이렇게 끌고 가는 거냐.”
“우리 대왕께서 가야 왕족들을 모두 데려오라 하셨소. 현향 공주 아사.”
아사는 이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알고 놀라 상대를 보다가 ‘헉’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다, 당신은.”
“나를 기억하시는군, 아사 공주.”
아사는 온 증오를 담아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때 곰에게 죽게 내버려둘 것을.”
융은 아사의 독기가 오히려 가소로운 듯 껄껄 웃었다.
“그러게 말이오. 내가 신라 장수란 것을 알았다면 그 화살을 내게 쏘았겠지.”
“당연한 소리. 버러지 같은 신라의 첩자!”
“첩자 노릇을 하러 가야에 간 것은 사실이니 그 말도 받아주지.”
융이 아사를 말에 싣고 뒤늦게 쫓아온 병사들과 합류했다.
일단 저항을 포기하고 융의 말에 실려 가던 아사는 병사들이 수습하려 놓아둔 문효 왕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문효야!”
‘아차.’
시신을 미리 수습하지 않아 아사에게 못 볼 것을 보게 한 융은 순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아사는 융의 힘이 늦춰진 틈에 말에서 뛰어내려 문효의 싸늘한 몸을 끌어안았다.
“문효야……. 문효야.”
융도 무형랑도 어찌할 바를 몰라 오열하는 아사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기가 막힌 듯 멍하니 동생의 시신을 보다가 또 통곡을 하던 아사는 동생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발견했다. 융이 말릴 사이도 없이 초인적인 힘으로 화살을 밀어 등 쪽으로 살이 나오도록 해 살을 부러뜨리고 나머지 부분을 앞으로 빼냈다.
남자도 맨 정신으로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놀라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이 움찔할 정도로 한이 가득한 차가운 얼굴을 들었다.
“깨끗한 물을 줘요.”
“어쩌려고……?”
참견하려는 무형랑을 눈짓으로 막은 융은 아사의 뜻대로 해주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상황을 눈치 채고 남부여군이 달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경에 오래 머무는 것이 못내 불안했지만 융의 명령이라 어쩌지 못하고 가죽주머니에 든 물을 아사에게 건넸다.
아사는 물로 흙먼지가 가득한 문효 왕자의 얼굴과 손 등 드러난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더니,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이 사람이 아닌 듯 아무렇지도 않게 속치마를 풀어 내렸다. 너무나 태연한 모습에 오히려 융과 무형랑을 비롯한 병사들이 무안해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비교적 깨끗한 속치마를 펼쳐 동생의 시신을 감싼 아사는 그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정말로 공주다운 거만한 어조로 융에게 요구했다.
“문효 왕자를 여기에 묻게 해줘요.”
아사의 요구에 무형랑이 펄쩍 뛰었다.
“우리 대왕께서 가야의 모든 왕족들은 신라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아사는 무형랑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융만을 보며 말했다.
“문효는 가야의 왕자로 죽었으니 가야 땅에 묻겠어요.”
융은 맹하고 순하게만 보았던 아사의 독기 서린 모습이 의외라 흥미를 느끼고 반문했다.
“내가 공주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이유가 뭐요?”
“전공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시체보다는 살아 있는 공주를 끌고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공주가 목을 매거나 칼로 자결하게 둘 만큼 멍청한 것 같소?”
“죽는 방법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문효의 시체가 신라 땅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받지 않게 하리라 결심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대화를 융과 주고받으면서 그녀는 처량하게 생각했다.
‘남매가 시체가 되어 나란히 신라 땅으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융은 아사의 협박이 뜻을 이루기 위한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란 것을 알았다.
“당신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사로부!”
융이 아사의 뜻을 받아들일 거란 것을 알아챈 무형랑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융과 아사는 서로만을 쳐다보며 계속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현향 공주 아사로서 약조해요. 당신이 나를 신라의 왕에게 데려갈 때까지 내 뜻으로 죽지는 않겠어요.”
독기 가득한 아사의 눈을 한참 내려 보던 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약속을 믿어보지.”
융은 무형랑에게 눈짓을 했다. 불만으로 입이 퉁퉁 나온 무형랑은 부하들을 시켜 길가 나무 옆에 문효 왕자의 무덤을 파게 했다.
아사는 병사들이 땅을 파는 동안 문효 왕자의 주검 옆에 장승처럼 앉아 살아 있는 동생을 만지는 것처럼 아직 따뜻한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융은 여자들이 죽음 앞에 눈물을 쏟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이렇게 냉정한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사가 통곡을 할 때보다 더 불편한 심정으로 문효 왕자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봤다.
한 나라의 왕자였음에도 관도 없이 누이의 속치마에 둘둘 말려 걸인처럼 땅에 누운 동생의 시신. 그 위에 쌓이는 흙을 보면서 아사는 속으로 맹세했다.
‘기다리렴. 문효야. 금방 따라갈게. 내가 이 원수를 갚을 때까지만 기다려줘. 그때까지 부처님 곁에서 누나가 오기를 기다리렴.’
들짐승들이 묘를 상하지 않도록 무덤 위에 쌓는 무거운 돌의 마지막 하나까지 꼼꼼히 놓이는 것을 본 아사는 몸을 돌렸다.
“이제 됐어요. 나도 약속을 지키지요.”

융의 말에 실려 그 자리를 떠나면서 아사는 불과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영수 왕자가 그곳에 왔다는 것도, 영수 왕자가 그녀를 찾아 한참이나 가야 국경을 넘어왔다가 하는 수 없이 돌아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운명은 그렇게 짓궂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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