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끝났거든요. 그러니 더 이상 내 일에 간섭하지 마요.”
“야, 홍은빈! 나한테 졌다고 이렇게 뒤끝 작렬할래?”
“선배가 뭘 알아?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했는데? 선배는 그저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서 그거 회복하겠다고 나선 거지? 자존심에 금 좀 가면 어때? 대신 선배는 돈 많잖아? 내 뒷바라지하느라 우리 부모님 허리가 얼마나 휘는 줄 알아?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아니고, 전액 장학금 받지 못하면 우리 부모님, 키우던 소 팔아야 한다고! 살 만큼 사는 사람이 왜 그리 모질어? 성시언 잘난 거 아니까 적당히 하고 좀 져주지.”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쏟아내던 은빈이 제 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찌질이 같네.”
“좀 더 일찍 찌질해지지 그랬어. 그랬다면 나도 이렇게 목숨 걸고 달려들진 않았을 텐데.”
“그러게, 내 꼴에 세울 자존심이 뭐 있다고 그랬을까? 진즉 이렇게 고개를 숙였으면 진정한 엄친아이신 아량 넓은 선배님께서 적당히 봐주셨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머리 숙였으니 다음 과 수석은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제 명예로운 입사를 위해서 말이죠.”
“넌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니? 그래도 다른 애들한텐 제법 공명정대하게 대하던데 왜 나한테만 너그럽지 못해? 한 번, 단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줘도 되잖아.”
“훗! 지독한 자격지심 때문에요.”
“뭐?”
“모든 걸 갖고 태어났고, 이후로도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선배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상실감 때문에요.”
“왜? 내가 대체 뭘 그리 잘못한 거니? 내가 에브리 유업 손자라고 거들먹거리기를 했니, 그렇다고 애들을 무시하기를 했니? 오히려 과 회식할 때 저녁 사고,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줬어. 내가 나서면 해결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그게 싫어요.”
“하!”
“누구는 내고 싶어도 회식 값이 없어서 빠져야 하는데, 모두가 먹은 회식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낼 수 있는 거. 누구는 몇 날 며칠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녀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전화 한 통에 간단히 해결하는 거. 그래요, 선배는 거들먹거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선배가 할 수 있는 겸손과 예의의 다잖아요. 거들먹거리건 그렇지 않건 손에 쥐고 있는 건 변함없으니까.”
“그래, 맞아. 하지만 네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듯 나도 부잣집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거 아니잖아.”
“그래요. 그러면 차라리 난 공부 따위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다니지 그랬어요? 그렇게 머리까지 좋은 티를 내고 싶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게 그거뿐인데. 내 집안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도 괜찮다는 거 네가 알아줬으면 했다고. 그러려면 성적밖에 없잖아.”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인간이라고 내 인정을 받고 싶으셨을까?”
그녀의 비아냥거림이 최고조에 달했다.
“인정받고 싶으셨다니 인정해 드리죠. 그래요, 전액 장학금 못 받는 거 한 학기 호의호식한 값을 치른 걸로 퉁 치자고요. 하지만 다시는 선배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이젠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요. 더 이상 꼴 보기 싫으니까.”
“호의호식한 걸로 치겠다고? 정말 그게 다야? 너처럼 머리 좋은 녀석이 정말 눈치 못 챈 거야?”
비웃음이 가득한 그의 말에 은빈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만으로 시언은 답을 얻어냈다. 그게 지난 넉 달 동안의 수확이었다. 그녀의 사소한 습관까지도 파악하게 된 것 말이다.
“대답이 없다는 건 눈치 챘다는 건데? 그렇지, 홍은빈?”
시언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널 좋아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너에게 괜찮은 남자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어. 집이 쫄딱 망해도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것 어렵지 않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거 보여 주고 싶었다고.”
“그럼 집이 쫄딱 망하면 와요. 그땐 성시언 그 자체로 봐줄 테니. 지금의 성시언은 인기가 너무 많거든요. 난 그 대열에 끼는 거 사양이에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