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억압당하고 있을 때 소수가 누리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지구가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개개인의 관계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사는 형편이 나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행위를 부끄러움 없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가령 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와 문화에 의해 억압당하는 어떤 나라가 있을 경우에,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부자유스러운 쪽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억압당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가 있다고 할 때, 그 자는 자유로운 자가 아니다. 거짓 자유를 참 자유로 오해하는, 자기 기만에 사로잡힌 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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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인간은 모나드라는 이름의 창 없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좌익 니체주의자들은 이게 집단에서 해방된 독립적 인격의 철학적 표현이라는 말은 생략한다. 그리하여 좌익 니체주의자들이 이모나드의 벽을 깨고 창문을 내주면, 우익 니체주의자들은 학연, 지연, 가족, 민족, 국가니 뭐니 여러 가지 집단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쓸데없이 인간 관계를 지극히 복잡하게 만든다.
좌익 니체주의자들이 자율적 주체란 환상이라고 말하면, 우익 니체주의자들은 명령을 내려줄 지도자를 기다리는 <민중의 염원>을 운운한다. 좌익 니체주의자들이 무의식을 의식의 감옥에서 풀어주면, 우익 니체주의자들은 풀려나온 무의식을 공격 본능으로 바꾸어 <약탈 물을 얻는 것에 대한 동경과 쾌감>을 선전한다. 좌익 니체주의자들이 <숭고의 미학>을 얘기하면, 우익 니체주의자들은 죽은 파시스트를 졸지에 숭고한 영웅으로 변용시켰다.
우익의 전근대와 좌익의 탈근대의 이 괴상한 만남.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쨌든 이 두 흐름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과대 평가를 공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이제 근대의 기획은 완수되었다고 판단하여, 우익은 이 업적을 남겨주신 죽은 독재자를 찬양하고, 좌익은 지레 그 자본주의적 발전상에 질려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이 두 흐름은 한마디로 <근대>를 졸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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