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기존의 결혼 적령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아니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상황이 바뀌었다. 이미 서양 선진국들은 결혼 적령기란 개념 자체가 사라지다시피 했다. 적어도 드러내고 남에게 충고할 소재는 아니다.
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 해야 한다. 따지기 시작하면 결혼하기 어려워진다”라고 근거를 댄다. 경험이 적을수록 판단의 기준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멋모를 때 결혼해서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무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문제는 결혼 후라고 자연히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부뿐 아니라 아이의 인생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혼 적령기는 선택할 수 있다」중에서
결혼하라, 혹은 하지 말라, 아이를 낳아라, 혹은 낳지 말라. 이에 휘둘리지 않고 철저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현명하다. 어중간하게 흘러간 인생은 돌이킬 수 없다. 비혼을 선택했거나, 결혼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건 어떤 결정적 시기에,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무언가를 놓쳤다는 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마찬가지다. 결혼이 현실이듯 비혼도 현실이므로 ‘형이하학적’ 면도 자세히 따져야 한다. 마치 사업계획서를 쓰듯 말이다.
---「결혼이 현실이듯, 비혼도 현실이다」중에서
싱글 입장에서는 ‘결혼하더니 자기 자신을 잃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고 해서 지겹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기혼 입장에서는 ‘얘는 여전히 자기만 아는구나.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을 왜 이리 하소연할까?’ 하고 오해할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태도가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면 ‘결혼한 친구는 이민을 갔다’고 생각하는 방법이 도움된다. 문화도 다르고, 시간도 더 적으며, 신경 써야 할 새로운 사람들이 친구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배려하면 기혼 친구도 우정을 지키고 싶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싱글은 주위 환경, 입장이 크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늘 살던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다. 하지만 마지막 탈피를 하며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는 나비처럼, 성숙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싱글과 기혼,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라」중에서
수많은 작은 선택, 불합리한 선택을 거부하는 선택이 커다란 결과를 만들고, 그것이 자신의 미래를 바꾼다. 부당하거나 스스로 도저히 참지 못할 일은 거부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은 적극적으로 하는 태도가 10년, 20년 후에는 커다란 차이를 불러온다고 믿는다.
편견과의 싸움도 중요한 과제다. 한때 유행어처럼 번진 ‘화려한 싱글’이나 ‘골드미스’란 개념은 비혼이어서 기혼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는 억압이 묻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박한 싱글’, ‘브론즈미스’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설령 불행해지더라도 그 이유는 ‘결혼을 안 해서’가 아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법 제도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작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기쁨에 대한 욕망도 충분히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오롯이 나의 행복을 위해 선택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