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오育吾 만민영萬民英 (1523년~1605년)
선조는 강하(지금의 호북 무한주 일대)의 사람, 명 영락(1403~1424)때 조부 만의유 어사를 대녕도사위로 폄하되어 있지만 역주성 내에 거주하였다.
명 가정 28년에 향시에 급제하였고, 29년(1550년) 庚戌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이때 쯤에 하남도 감찰어사, 복건성에서 병비참의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관직의 최고는 대략 종3품에 해당한다.
丁巳 운, 癸亥 유년에 파직과 모친상을 당하는 가장 참혹한 재해를 당했다. 성정은 절개가 곧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권문귀족에 있는 모함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파직되었고,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핑계삼아 고향으로 되돌아가 벼슬길에서 벗어났다.
30년 긴 기간 은거하였으며 향학을 세워 제자를 거두었다. 또 자선과 교육에 성의를 다하여서, 이시신 등 20여명의 제자가 있었다.
도읍에서 매년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누각을 세워 음식을 제공하는 등, 공익을 위한 많은 일들을 하였다.
편저한 서적은 역경회해, 삼명통회, 성학대성, 난대묘선, 음부경, 상자심경을 간행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외에도 도덕경해, 종교역간, 언지만고, 국화보, 등을 자작하여 가문에 보관되어 있다.
명 만대(명 신종의 연호 1573~1620) 癸卯 년 향년 82세에 불록하였다.
서고촌서에 장례지냈고, 상원 주지번이 비문을 썼고, 탐화 조장, 방안, 류사중이 비碑에 적혀있다. 역현 박물에 묘지명이 보관되어 있다.
점성과 관상에 대한 것만 아니고 명리 연구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성학대성과 삼명통회는 중국 사고전서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