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이라는 그가 소개팅 첫날 한 대구 통닭에 대한 찬사만큼 나를 칭찬했다면, 화는 금세 가라앉았을 거다. ‘특별하다, 남다르다, 한번 접하면 절대 못 잊는다, 계속 먹고(보고) 싶다, 자꾸 생각난다, 개성이 남다르다, 이 도시의 자랑이다, 어딘가에 자랑하고 싶다!’ 고구마 씨. 잘 봐! 위 문장들에다가 주어만 살짝 바꿔주면 된다고. --- p.30
많은 사람이 대화하면서 진짜 마음을 은폐한다. 나도 그렇다. 특히 마음이 아주 연약할 때는 더. 나를 오해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뻔한 말’만 이어가는 게 안전하다고 느낀다. “진짜 대단하세요.”, “사는 게 다 그렇죠.”, “열심히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아, 뭐. 그럭저럭 괜찮아요.” 이런 말은 순식간에 수백 개쯤 자동생성할 수 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돌아오는 밤엔 그야말로 술이 당긴다.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괴롭다. 하고 싶은 말은 그대로 고여 있다. 진짜 마음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다. --- p.26
“오늘을 잘 지냈냐고 묻지 않는 건 나를 슬프게 만들어. 내 하루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종종 너는 집에 와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아. 스마트폰을 보고 모니터를 보지. 네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건 좋아. 하지만 귀가 인사를 하고, 잘 지냈냐고 묻고, 하루의 즐거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잖아. 서로 진심으로 인사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외로워져, 자꾸만.” --- p.72
사람들은 흔히 말재주가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결국 대화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말수가 적어도 진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수다스럽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 정확한 순간에 정확히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더 매혹적이다. 그가 뭘 좋다고 하면 그건 진짜 좋아 보인다. 빈말을 할 바엔 침묵을 택하는 사람이 그이기 때문에, 깊고 단단한 신뢰가 생겼다. --- p.37
사랑을 선택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여리고 약한 부분을 의식한다. 세상의 공기가 모래바람처럼 느껴질 때,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서툰 외국어 같을 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그냥 누워서 스마트폰만 넘기고 있을 때, 내가 너무 못생긴 것 같아서 누구도 만날 수가 없을 때, 그럴 때라도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니까. 맑고 화창한 날에만 만날 수는 없으니까. 사랑은 데이트와는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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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과 카페에 앉아서, 둘 사이의 대화가 멈출 때를 기다린다. 말의 빈자리를 응시한다. 말과 말 사이 섬이 생길 때, 기쁘다. 커피잔을 조용히 들어서 호로록 마시며 나는 좀 응큼하게 즐거워한다. ‘이제 우리는 대화 중 공백도 견딜 수 있는 사이가 되려나.’ 하고서. 상대가 어색함을 뚫고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꺼내는 화제가 뭘까 궁금해도 하면서. 그 화제가 오늘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의 새빨간 이슈라면 나는 스푼을 들어 식은 차를 빙빙 저으며 1퍼센트 낙담하고, 그게 아니라 나를 만나러 오던 길에서 본 혼자서 말을 하는 할머니나 그 곁에 고요히 서 있던 더러운 개에 대한 염려라면 1퍼센트 설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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