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커밍아웃한 게이감독
남남 러브스토리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도혜나이 마흔셋에 어떻게 영화감독이 될 생각을 했나?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영화도 계속 제작해왔으니 못할 일도 아니고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연출에 뜻이 있었다면 왜 조금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나?
광수제작자로 10년 동안 일하면서 연출을 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영화 연출은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는 사람들은 감독으로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년필름에서 오랫동안 여러 감독들 그리고 프로듀서들과 영화를 만들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직접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 생각은 ‘나라고 못할 것 없지 않나?’가 되었고, ‘내가 원하는 스태프들과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로 발전했다. 내가 늘 그렇듯이 ‘그럼 한번 해볼까?’ 하는 식으로 갑자기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어보니까 내가 원하는 걸 직접 만든다는 희열이 컸다. 프로듀서로 참여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어떤 것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군대에 다녀온 이후 계속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 제일 윗사람이거나 대표였다. 리더의 역할이 내 기질과 맞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내가 직접 실무 경험을 못 해보는 것, 큰 틀을 짜고 계획은 세우지만, 내용을 채우거나 현장에서 실무를 보는 사람과 언제나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게 허전했다. ‘기획자의 헛헛함’이랄까, 그게 쌓여서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같다.---pp.29~30
‘재미’와 ‘교육’ 사이에서
도혜 작품을 통해 재미를 주면서 어느 정도 교육의 기능도 하겠다는 건데, 사람들에게 정말 알리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가?
광수 첫 번째는 우리 사회에도 행복한 이반(이성애자들을 ‘일반一般’으로 일컫는 것과 구별해서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로, 한자로는 ‘異般’ 또는 ‘二般’이라고 쓴다)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반들이 ‘아, 나도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한다. 보다 중요하게는 일반들이 이반의 삶과 사랑을 대할 때 그들의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동성애자들의 삶은 차별과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대부분이고, 동성애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시각을 가진 관객은 이들과 함께 슬퍼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이런 패턴을 깨고 싶다. 내가 정말 싫은 것은 그런 내용의 영화는 이반은 이반대로 극장에서조차 또다시 그런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하고, 일반은 일반대로 ‘그래, 너희들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하는 온정주의적 시선을 갖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들은 불행하고, 우리는 행복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쓰이는 게 가장 안 좋은 경우인데, W 같은 프로그램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W는 세계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그것을 통해‘우리는 저렇게 살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다.---pp.40~41
2장 광수의 학창시절
첫사랑,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
도혜 선생님 말고, 또래가 등장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기대된다.
광수 중학교 3학년 때다. 5월이었는데 학교 뒤편 언덕으로 난 오솔길로 가끔씩 혼자 산책을 가곤 했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가 진동하는 그 예쁜 길이 끝나는 곳에 체육관이 있었다. 나는 체육관 2층의 작은 창을 좋아했다. 색색의 유리로 장식된 그 창이 왠지 신비로워 보여서 그 방에 들어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도 가질 수 없어서 더 마음이 가는 그 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이 열리더니 어떤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보다 얼굴이 더 희고 눈은 더 까만, 말 없는 우리 반 아이 해성이였다. 바다 해, 별 성. 촌스러운 내 이름 광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정만화에서 똑 떨어져나온 것 같은 아이. 우리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한동안 바라봤고, 해성이는 내 마음으로 쏘옥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홍역을 앓듯이 열이 올랐다. 며칠을 학교에 못 갈 정도로 계속 아파서 누워 있는데 엄마가 친구가 찾아왔다며 나와보라고 하셨다. 설마 했는데, 해성이었다. 선생님께 주소를 물어서 찾아왔다며 수줍게 웃고 있더라. 해성이 손에 들려 있던 황도 통조림. 그날부터 나는 일기장에 해성이의 이름을 가득 쓰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세 달을 혼자서 가슴앓이하다가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해성아, 나 너 좋아해”라고. 그러고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신발만 쳐다봤다. 그런데 들릴 듯 말 듯한 수줍은 목소리로 해성이가 대답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나 일주일 뒤에 호주로 이민 가.” 우리 사랑에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pp.73~74
호모 병을 고쳐보려고 폭력서클에 들어가다
도혜 고등학교 시절에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즐거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광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고교 시절 나의 ‘호모 병’을 고쳐보려고 재미있는 시도를 두 번 해봤다. 우리 학교에는 ‘피닉스’와 ‘엽전’이라는 두 개의 폭력서클이 있었는데, 그런 애들과 어울리면 내가 남자다워지고 남들과 다른 면을 바꿔보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피닉스에 가입하러 갔는데, 선배들은 나를 우습게 여기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 싸움을 잘하는 친구를 꼬드겨서 함께 가입하자고 했다. 그 친구와 함께 갔더니 나까지 받아주더라. 몇 달을 그들과 다녔는데, 언제나 나를 여자 취급하고 싸울 때는 숨어서 망보다가 소리치는 일만 시켰다. 나는 그들처럼 씩씩한 남자가 될 수도 없었고,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p.86
3장 청년필름 Scene #1
첫 작품 「해피 엔드」로 칸영화제에 입성하다
도혜 청년필름의 첫 작품 〈해피 엔드〉의 탄생 비화를 듣고 싶다. 처음으로 상업영화를 만들려니 어려움이 많았을 거다.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 명필름과 함께 작업하게 된 이야기도 궁금하다. 시나리오, 캐스팅, 투자 등 각 단계마다 영화의 운명이 이리저리 굽이쳤을 것 같은데.
광수 1997년 말에 용균이하고 지우가 청년필름 깃발을 들고 “프로듀서들아 모여라”를 외쳤다. 상업영화를 만들고는 싶은데 다른 영화사에 가면 자신들의 색깔을 잃을까봐 걱정되고, 그렇다고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서 좋은 시나리오를 써낼 자신은 없었던 거다. 김용균 감독, 정지우 감독, 그의 아내 곽신애, 신창길, 이선미, 심현우, 김조광수, 이렇게 일곱 명이 모여서 둘 중 어느 감독을 먼저 데뷔시킬까를 의논했다. 가위바위보를 할 수도 없고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감독들이 시놉시스를 내면 그걸 보고 어떤 영화를 먼저 만들지 정하기로 했다. 한꺼번에 두 작품을 만들 여력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용균은 다섯 페이지짜리, 지우는 반 페이지짜리 시놉시스를 냈다. 용균은 전상국의 소설 《우상의 눈물》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왔는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많이 닮아 있었다. 임권택 감독님께서 영화로 만든 적도 있고 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새롭지 않은 이야기로는 돌파력을 갖기가 힘들 것 아닌가. 청년필름의 첫 작품, 김용균의 데뷔작으로 크게 매력적일 것 같지 않았다. 지우의 시놉시스는 짧았지만 여러 가능성이 보였다. 캐릭터나 줄거리는 없는 상태였지만, 왠지 기대가 됐다. 세기말을 겨냥하고,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면은 금가고 망가진 대한민국 중산층의 붕괴된 가정을 다루겠다는 콘셉트가 좋았다.---pp.127~128
4장 청년필름 Scene #2
영화사에도 노조가 있어야 한다
도혜 처음으로 월급제를 시행한 건 어떤 작품 때부터였나?
광수 〈질투는 나의 힘〉을 만든 2000년부터 월급을 줬는데, 엎어진 영화들도 제작부와 연출부는 일한 기간만큼 급여를 받아갔다. 감독 개런티를 못 주고 있다가 나중에 준 적은 있어도 연출부나 제작부 임금을 안 준 적은 없다. 상업영화 제작 현장에서 내가 가진 진보적 성향을 작업에 담아내려고 그나마 실천한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고, 또 하나는 노조를 만든 것이다. 우리 회사에도 노조가 필요하긴 했지만, 보다 중요한 목적은 ‘영화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연출부원, 제작부원들과 만나는 자리마다 노조를 만들어서 권익을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스스로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지금은 영화산업노조가 있지만, 그때는 거의 나 혼자 외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영화산업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네 가지 직종이 있다. 연출, 제작, 촬영, 조명. 이들은 그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미술, 분장, 의상 등은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노조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pp.176~177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제작자가 되고 싶다
도혜 제작자로서 앞으로 꼭 만들고 싶은 건 어떤 영화들인가? 좌절된 기획 중에서 아까운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
광수 아까운 기획으로는 〈예체능가족〉 〈청년 백수당〉 〈공포영화시리즈-십계〉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지금 되살리고 싶은 프로젝트는 없다. 제작자로서 하고 싶은 영화는 가족영화와 3D영화고, 감독으로서 해보고 싶은 영화는 뮤지컬영화다.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사는 가족을 구성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 연출할 욕심을 낼 수는 없겠지만, 해체된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에 이르는 이야기? 보편적 소구력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신파적인 면도 가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완득이〉나 〈마당을 나온 암탉〉 〈리얼 스틸〉 같은 작품들을 우리 시대 가족영화의 표본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온 가족이 함께 극장에 가서 보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사실 가족영화야말로 상업적 흥행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영화가 3D로 제작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고, 미리 도전해보고 싶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만드는 과정에서든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는 것, 그런 역동성이 이 업계에서 일하는 짜릿함이 아니겠나.---pp.182~183
5장 결혼, 결혼식, 성 소수자 인권운동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
도혜 당신의 마음속에 결혼식이란 어린 시절 추억에서처럼 어떤 동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취적 표현이자 운동으로 진화했다.
광수 그런 면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결혼과 결혼식의 낭만적인 느낌을 잃고 싶지 않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의사 표현이기 이전에 나 이외의 또 한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즉 그 사람과 가족을 구성해 일생 동안 사랑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권리를 어떤 형태로 획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동성 간에도 허용해야 한다는 ‘동성 결혼 합법화’가 하나고, 나머지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행하고 있는 ‘시민결합’의 제도화다. 시민결합은 성별, 애정관계 여부를 가리지 않고, 동거하는 두 사람의 연대를 인정해 결혼에 준하는 사회보장적, 법적 권리를 주는 대안적인 결합 제도다.---p.193
LGBT센터의 설립을 꿈꾸며
도혜 친구사이를 기반으로 활동해왔는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LGBT센터를 만들려 하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련 단체들의 현황은 어떤지, 구체적인 목표들은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광수 ‘무지개센터’라는 이름의 LGBT센터를 2~3년 안에 설립하는 게 단기 목표다. 그 일은 나의 동반자 화니가 자신의 일로 맡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센터들에 관한 리서치를 주로 하고 있고, 해외의 여러 단체들과는 필요할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게 될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의미 있는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기금을 모으는 일로 이어지도록 할 생각이다. 우리의 결혼식이 그중 하나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또 퀴어영화를 제작하고 수입하는 일, 퀴어영화제 같은 문화적 행사도 운동적인 시너지를 내도록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p.208
6장 커밍아웃
나는 게이다!
도혜 게이의 삶에서 넘어야 할 거대한 산, 커밍아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신이 게이라는 걸 중학교 때 알았다고 했다. ‘20번 버스 유랑’의 어두운 시절 말이다. 그때는 커밍아웃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 같다. 생애 첫 번째 커밍아웃은 언제, 누구에게 했나.
광수 사실 이걸 커밍아웃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의 맨 처음 커밍아웃은 어쩌면 고등학교 때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불쑥 물었다. “광수 너하고 몇몇 친구들 사이는 너와 나 사이와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뭐지?”라고. 이 친구는 나하고 꽤 친한 녀석이었다. 아주 똑똑하고 예민한 편이었고, 우리 둘은 다른 애들과는 하지 않는 ‘어려운 얘기’를 하는 그런 사이였다. 문학이 어쩌고 예술이 어쩌고 하던 평소와 달리 갑작스럽게 개인적인 질문을 해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나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무슨 사이냐고? 나 걔들하고는 뽀뽀도 하고 그래!” 내가 감출 것 없다는 당당한 말투로 말하니까 오히려 질문한 쪽이 뻘쭘해졌다. 아마도 그것이 일종의 커밍아웃이었던 것 같다.---pp.217~218
사회적 커밍아웃을 감행하다
도혜 또 하나의 숙제였던 사회적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다른 여러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개인과 집단도 있지 않은가.
광수 사회적 커밍아웃을 위해서는 또 다른, 어쩌면 더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에게 비교적 일찍 커밍아웃한 것에 비해 사회적 커밍아웃은 그보다 훨씬 뒤인 2006년에야 하게 되었다. 2001년 〈와니와 준하〉를 개봉할 때 기자 시사회가 끝나고 나서 한 스포츠지 영화담당 기자 K로부터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영화에 김희선의 선배로 게이 부부가 나오는데 그게 당신을 모델로 한 거라고 들었다,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헉 하고 말문이 막히면서 덜컥 겁이 났다. 특히나 스포츠지는 같은 내용이라도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기사를 쓰지 않나.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기사 안 쓸 테니 솔직히 말해달라고 했고, 나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그는 그날 이후 사흘에 걸쳐서 세 번이나 전화해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아니라는 대답을 세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와락 눈물을 터뜨렸다. 한 시간도 넘게 엉엉 서럽게 울었다. 내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너무 슬펐다. 그때 당당히 게이라고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커밍아웃할 준비가 안 되었다기보다 청년필름의 대표였기 때문에 동료들이나 영화에 누를 끼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회사가 지금 정도의 인지도나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나 때문에 투자나 캐스팅이 안 된다면, 그 호모가 제작하는 영화에 투자 안 하겠다, 출연하지 않겠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정말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pp.22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