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이 교황 지배의 시대였다는 것은 유럽의 군주, 제후 세력들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교황이 최상위 군주 권한을 행사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의미를 지나치게 과장하면 안 된다. 교황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한 기간은 2백 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상징적으로는 그런 지위였다 하더라도 교황은 프랑스 국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에서 끝없이 정치력을 발휘해야 했다.
--- p.19, 「1. 중세사와 중세교회」 중에서
그 시대를 비판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어떻게 그 어둠을 벗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진화할 수 있었는가 생각해야 한다. 이교 문화와 혼합되었다는 비판에 머무르지 말고, 그리스도교가 적극 민중들 속에 파고들어 갔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문명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종교에 녹아 있던 불순물이 정화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p.49, 「2. 무너진 서로마」 중에서
중세 가톨릭교회는 위로는 교황제, 아래로는 수도회가 조화를 이루며 존속했다. 가톨릭이 시대마다 개혁이라는 탈바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 중심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제도 교회를 견인할 아래로부터의 개혁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p.80, 「4. 아래에서 형성되는 힘」 중에서
무슬림 사회 속에 살던 그리스도인을 ‘모사라베’라고 했는데, 그들은 개종을 강요받는 대신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보호받는 계약을 무슬림 통치자와 체결하였다. 이 계약에 따라 그들은 독자적인 사법권을 소유했고, 종교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 발렌시아, 톨레도 등 주요 도시에 정착했다. 대체로 농업이나 상업 활동에 종사했지만, 관직에 오르거나 무슬림 군대의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슬람의 생활양식과 그리스도교의 생활양식 모두를 알고 아랍어와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다.
--- p.160, 「7. 문명의 공존과 충돌」 중에서
종교는 사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당연하지만 새삼스러운 인식이 고도로 교권화된 성직 체계를 흔들었다. 더 나아가 이단 운동들은 교황이 보유한 세속의 권세는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 두 운동[이단 운동, 탁발수도회 운동]은 과도한 성직자 중심주의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세력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사도적 삶(vita apostolica)과 사도적 청빈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 p.276, 「11. 교권 강화의 반작용」 중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각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오래된 분열의 마침표일 뿐이다. 그 내리막길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정치적 패배와 1309년 아비뇽 유수부터 길게 이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국가’가 되었다. 국민국가의 출현과 성장으로 하나의 가톨릭교회는 각 국가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국가교회로 분화되었다. 피사 공의회의 소집과 실패는 교황청의 문제에 세속 군주들 사이의 합의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 p.322, 「12. 가톨릭교회, 분열되다」 중에서
종교의 가치는 선언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감하고 수용할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중세의 끝자락이 스콜라학의 퇴행이라는 쇠락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예고했다면, 지금 교회가 애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인다.
--- p.368, 「에필로그」 중에서